지난달 29일 공개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 쿠팡플레이 드라마 '가족계획'에서 고등학교 '일진'인 규태(배재영)는 같은 학년 친구인 지훈(로몬)과 지우(이수현)의 집에서 자고 난 뒤 시름시름 앓는다. 몸엔 상처 난 곳 하나 없는데 아프다며 벌벌 떠는 규태가 그의 아버지는 답답할 뿐이다.
규태가 망상에 빠진 걸까. 실상은 이랬다. 규태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을 몰래 사진으로 찍어 음란물에 합성하고 피해자를 협박한 딥페이크 성착취 범죄자다. 수의사 영수(배두나)는 딸처럼 키우는 지우가 학교에서 딥페이크 범죄의 '먹잇감'이 된 걸 알고 일종의 최면으로 규태의 머릿속에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끔찍한 처벌'을 받은 것 같은 기억을 심었다. 특수교육대에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능력을 훈련받은 덕분이다.
'지옥에서 온 판사'와 '베테랑2' 등 사적 제재를 소재로 한 드라마와 영화들이 잇따라 공개됐지만 '물리적 폭력' 대신 잊히지 않는 '정신적 고통'으로 응징하는 방식을 보여주기는 이례적이다. 김정민 '가족계획' 크리에이터는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이 법으로 처벌받는다고 피해자와 유족들이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다"라며 "가장 확실한 응징은 피해자에게 가했던 행동과 고통의 기억을 가해자에게 심어주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드라마의 복수 방식에 변화를 준 계기를 들려줬다. 배두나는 "성매매와 학교폭력 범죄들이 이 작품에 녹아 있다"며 "남에게 피눈물을 쏟게 한 범죄자들에게 영수가 '너희도 그런 지옥을 맛봐야 한다'며 정신적으로 응징하는 내용을 대본으로 읽으며 분노했고, 나도 모르게 끌렸다"고 말했다.
'피'로 얼룩졌던 범죄 드라마가 달라지고 있다. 가해자에게 정신적 공포, 즉 트라우마를 안기는 사적 제재의 주인공이 등장했고, 피해자가 어떻게 죽어가는지를 보여주지 않는 연출도 등장했다. 영상물등급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6월 OTT 자체 등급 분류제가 실시된 뒤 올해 8월까지 '전체 관람가' 콘텐츠 비중은 40.8%로 조사됐다. 이 제도가 시행되기 1년여 전 '전체 관람가' 비중은 20.6%였다. 심의가 느슨해져 잔혹한 살해 장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범죄 드라마들이 쏟아지자 시청자들의 피로감이 커졌고, 결국 제작 현장이 바뀐 것이다.
잔혹함으로 시청자들을 잡아두려는 범죄 드라마의 관습을 깨는 시도는 여성 연출자들의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박인비 감독은 지난주 마지막 회가 공개된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강남 비-사이드'에서 마약에 찌든 남성 고객들에게 살해당한 여성을 등장시키지만, 피해 여성이 어떻게 성적 유린을 당했는지는 보여주지 않았다. 송연화 PD는 지난달 종방한 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에서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죽어가는지를 카메라에 담지 않았고, 변영주 감독은 10월에 끝난 드라마 '백설 공주에게 죽음을-블랙 아웃'에서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10년을 살다 나온 주인공이 세상으로 나와 복수하지 않게 만들었다. 보복이나 물리적 응징 대신 △등장인물의 심리적 불안과 △왜 이것이 공포이고 범죄인지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 게 공통적 특징이다. 조직과 조직의 갈등으로 인한 피 튀기는 충돌(드라마 '폭군'·2024)이나 쫓고 쫓기는 추격 이후의 살인(영화 '추격자'·2008) 묘사에 치중한 주류 남성 감독들의 범죄물 제작 문법과 180도 다른 접근이다. 여성 연출자들이 진입 장벽이 높았던 범죄물 제작에 잇따라 뛰어들어 '콘텐츠 문법'을 바꿔 이뤄진 변화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종방 후 만난 송 감독은 "시청자들이 드라마 속 인물이 어떻게 죽어가는지까지 볼 필요는 없다"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상상하게 하는 게 더 큰 공포를 주고, 범죄 스릴러에도 잔인한 걸 넘어 다른 즐길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연출 의도를 들려줬다. '강남 비-사이드'를 찍은 박누리 감독은 "클럽 장면 등에서 성의 상품화나 선정성을 부각하지 않으려 했다"며 "흥미를 위해 너무 자극적으로만 묘사하면 누군가는 상처를 입고 보기 불편할 수 있어 최소한의 장면으로 노출하는 것을 고민했다"고 제작 배경을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