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반 공기 칼로리를 매일 상상에 쓰는 소설가 이유리의 '비눗방울 퐁' 터지는 환상

입력
2024.12.02 15:43
21면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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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메타버스 안에 그대로 재현해 영원히 보존하는 기술, 괴로운 기억으로 우려내는 담금주, 달리는 무릎에서 운동에너지를 흡수해 우주로 항해하려는 외계인, 그리고 먹으면 비눗방울이 되어 세상에서 사라지는 약까지.

온갖 상상으로 가득 찬 소설가 이유리의 단편소설집 ‘비눗방울 퐁’ 속 환상의 세계다.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만난 이 작가는 “하루에 밥 반 공기 분량의 칼로리는 상상에 쓴다”며 “갖지 못했거나 포기했던 것, 잃어버렸던 것을 많이 상상하는 편”이라고 귀띔했다.

화분이 된 죽은 아버지와 함께 사는 이야기를 담은 단편소설 '‘빨간 열매’로 2020년 등단한 이 작가의 소설이 상실의 빈자리를 상상으로 메워 온 까닭일 테다. 그는 “인간의 상상력 자체가 갖지 못한 것을 보완하고 말 그대로 상상하며 살 수 있도록 존재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경쾌하고 산뜻한 슬픔’의 가능성

이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슬픔’이다. 소설 속에서 어머니는 치매에 걸리고 남자친구와는 헤어졌고 반려고양이는 아프고 회사는 다니다 그만두기를 반복한다. 실망을 넘어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소설의 주인공은 “그때는 그때 가서”의 태도로 저마다의 삶을 묵묵히 이어 나간다. 능청스럽다 못해 자연스럽게 일상에 뿌리내린 채 슬픔을 어루만지는 환상과 더불어서 말이다. 상상력이 “평범한 일상에서 온다”고 말하는 이 작가는 “등단작도 아버지가 늘 하시던 ‘나무로 살아보고 싶으니 내가 죽으면 수목장을 해달라’는 이야기에서 왔다”고 말했다.

‘비눗방울 퐁’은 “독자들이 읽고 재미있고 산뜻한 기분을 가져가셨으면 좋겠다”는 이 작가의 바람 그대로의 이야기로 채워졌다. 수록작 ‘담금주의 맛’에서는 “하루에 1회 매일, 비슷한 시간에” 술이 든 유리병에 앉아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면 “기억이 모두 술에 녹아나고 마음은 편안”해지는 ‘기억-담금주’ 키트가 등장한다. 이렇게 만든 담금주는 평생 못 잊을 오묘한 맛의 명주가 된다. “겨울 이불을 봄 이불로 바꿔 덮거나 초여름에 샤워하고 나와 거실에 드러누워 있을 때의 기분처럼” 산뜻하게 번지는 위로다.

“차기작은 구름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

이 작가는 이번 소설집을 포함해 다섯 권의 책을 냈다. 내년에는 첫 장편소설을 세상에 선보일 예정이다. 동료 소설가 박서련이 공개적으로 “애타게 기다린다”고 밝힌 소설이다. 이 작가는 “전작이 산뜻하고 발랄한 느낌이었다면 새 장편은 굉장히 어둡고 힘든 소설”이라면서 “땅값이 올라 구름에서 살게 된 가난한 사람들이 철거민이 될 위기에 놓이는 설정”이라고 전했다. “살아가려면 모두가 집이 필요하지만, 모두가 자기 집을 가질 수 없다는 모순”을 짚는 소설이라고 이 작가는 말했다.

갈수록 문학이 외면받는 시대에 5년 차 소설가가 된 이 작가다. 그는 “문학을 읽을 필요는 사실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면서도 “문학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박연준 시인의 시집 제목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을 두고 “이 문장을 100명이 읽는다면 100가지 자기 사랑의 형태를 떠올릴 것”이라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텍스트는 영상이나 그림보다 훨씬 보는 사람의 고유성을 보장하는 콘텐츠라고 생각해요.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창작의 과정을 거치며 사고를 풍부하게 해주고 기분도 좋아지게 해주죠.”


이유리 작가가 직접 뽑은 ‘제철문학’은
소설집 ‘웨하스 소년’ “책 읽기가 버거우신 분들에게는 짧은 소설집인 ‘웨하스 소년’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올해 나온 소설집이고요, 정말 짧은 분량의 글을 묶어서 이 책으로 독서를 시작하신다면 비교적 쉽지 않을까요.”


전혼잎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