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만난 정부 의료개혁 당국자는 개혁 정책이 좌초되는 양대 이유 중 하나로 '정치권의 개입'을 들었다. 개혁은 추진 과정의 고통과 갈등을 감내하고 더 나은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일 텐데, 즉각적 여론 변화에 민감한 정치권의 개입은 정부 로드맵에 제동을 거는 쪽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2월 공식화한 내년도 의대 신입생 증원 정책이 대입 전형 개시로 9부 능선을 넘을 수 있었던 비결도 한동안 계속된 정치권의 무관심을 꼽았다. 실제 4월 총선 전후로 각 정당은 선거 준비와 선거 후 재정비에 집중하느라 의료개혁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내년 입시 열차가 이미 출발했는데도 전공의와 의대생은 '의대 증원 철회'를 고집하며 돌아오지 않고 선배 의사들도 점차 이들 편으로 모여드는 파국적 광경은 결국 정치권의 관심을 붙들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정부의 대화 요구에 꿈쩍도 않던 전공의 대표와 지난 8월 하순 면담한 일을 발판 삼아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을 적극 추진했을 때, 정부 당국자들 사이에선 가뜩이나 거센 의사들의 공세 앞에서 당정이 적전 분열 양상을 보이게 될까봐 노심초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 대표가 정부 방침과 달리 내년 의대 증원 규모 조정에 유연한 자세를 보인 점은 불안감을 한층 키웠다.
결과적으로 협의체는 야당 없이 여당과 정부, 의사단체 두 곳만 참여한 채 지난달 출범했다가 의사단체들마저 이탈하면서 3주 만에 와해되고 말았다. 어느덧 내년 의대 신입생의 3분의 2를 선발하는 수시모집이 다음 주면 합격자 발표를 하게 될 만큼 입시 일정도 한참 진행됐다. 정치권의 '훼방'은 협의체 좌초로 없던 일이 됐고 의대 입시는 돌이키기 힘들 만큼 무르익었으니, 정부 당국자들은 승리를 기약하며 한숨을 돌릴 수 있으려나. 글쎄다. 그 사이 의사단체 맏형 격인 대한의사협회(의협)는 회장을 탄핵하고 전공의가 지지한 인사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세웠다. 어떻든 의정 대화 여지를 마련하겠다며 협의체에 가담했던 두 의사단체도 의협 비대위의 단일대오 요구 속에 탈퇴를 선택하고 말았다.
정부가 공언하는 대로 내년도 의대 증원 선발을 되돌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제아무리 기세등등한 의사들이라도 의대 지망 수험생 가족들과도 일전을 불사하겠다며 전선을 확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대로 입시가 마무리되더라도, 정부가 의료개혁의 '첫 단추'라고 규정했던 의대 증원조차 완결 선언을 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교육당국의 제적 경고를 뚫고 기어이 동맹휴학을 관철해낸 의대 1학년생 3,000명이 내년에 복귀할지가 불투명한 가운데, 정부를 더욱 피 말리게 할 수 있는 상황은 의대 새내기 4,500명이 선배들의 수업 거부에 가세하는 사태다. 의대 진학을 염원하던 수험생 시절에는 의대 문호를 넓힌 조치가 마냥 반가웠겠지만, 의대 문턱을 넘어 기득권을 거머쥔 이상 이들이 정부에 계속 고마워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전공의 대표가 '69학번 없는 도쿄대'를 운운하며 내후년 의대 모집은 없을 거라고 위협했을 때도 이런 전망에 기댔으리라. 한 등급 높은 의대에 가려고 휴학 기간 재수에 성공한 의대생 수는 그대로 의대 증원의 허수가 될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당국자는 개혁 정책 좌초의 두 번째 이유로 개혁의 장도를 버텨낼 정부의 장기적 계획과 역량 부재를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