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동양의 수묵화

입력
2024.12.02 04:30
27면
종교

편집자주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며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그림은 형체의 묘사에 의미가 있다. 그래서 색을 사용하는 게 유리하다. 흑백사진에서 컬러사진으로, 흑백TV에서 컬러TV로의 변화는 색의 우위를 나타낸다. 백색 예술인 줄 알았던 그리스·로마의 대리석 조각들을 검사하니, 실제로는 채색된 상이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종교 미술에서도 집중도를 높이는 채색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동아시아에서는 색을 쓰지 않는 수묵화가 주요 전통 기법 중 하나지만, 불화만큼은 울긋불긋 채색화인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채색은 종교의 목적 전달이라는 ‘선명성’에서는 대체될 수 없는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종교미술뿐만 아니라 일반미술에서도 채색 전통을 지닌다. 그러나 동양화는 수묵화 전통을 고집한다. 물론 동양화에도 채색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직업 화가인 화원들에 의한 공필화(工筆畵·비단에 채색을 입히는 화법)에는 채색이 사용된다. 그러나 동양화 하면 역시 단색의 수묵화다. 채색화가 존재했음에도 단조로운 색상으로 그림을 표현한다는 것은 이례적이다. 그렇다면 왜 동아시아는 단색을 버리지 않았을까?

첫째는 붓의 공유다. 동양화에서는 ‘필기구로서의 붓’과 ‘미술에 사용하는 붓’이 일치한다. 그림과 서예가 서로 연결됨을 의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양에서는 직업 화가 작품보다 공부하는 문인화(文人畵·사대부 계급에서 발전한 화풍)를 높게 본다. 공부하는 여가에 그리는 공부인(工夫人)의 문인화는 채색보다는 익숙한 재료인 먹을 사용하게 마련이다. 이는 채색화보다 수묵화가 외연이 더 넓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나’가 아닌 ‘우리’라는 생각이다. 채색화에는 작가가 의도하는 뚜렷한 의도와 목적이 있다. 그러나 수묵화는 색의 선택을 작가가 아닌 관찰자가 할 수 있다. 미술의 완성이 작가만이 아닌 관찰자까지로 확대될 수 있는 ‘열린 개념’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동양화에서의 ‘우리’이다.

서양화의 구도를 보면 하나의 고정된 시선과 관련된다. 한곳에서 작품을 봤을 때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서양미술의 기초인 원근법도 한곳으로의 집중과 방향을 제시하는 기제다. 즉 서양화를 관통하는 것은 ‘나’인 셈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역시 같은 ‘나’이다.

반면 동양화는 전체를 보는 방식이며 원근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작가 의도에 구애받지 않는 관찰자의 자유도가 존재한다. ‘나’와는 다른 ‘우리’에 대한 관점이 여기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자현 스님·중앙승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