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미국 대선의 결과는 사실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정치사회학적 시각에서 볼 때 그렇다. 정치 신인이었던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던 2016년 당시의 사회구조적 조건이 그대로 남아 있거나 오히려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불평등에 따른 박탈감, 지나친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ly Correctness)에 대한 반감, 백인 우월주의에 기반한 인종차별 정서 등은 여전할 뿐 아니라 지난 수년간 악화된 인플레이션으로 그 체감 온도는 더 높아졌다. 2020년 팬데믹의 혼란 속에 치러진 대선에서 반트럼프 연합군을 구성해 가까스로 당선되었던 조 바이든 대통령이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잠시 멈춰 세웠을 뿐, 정치이념으로 트럼피즘의 파워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1세기 미국에서의 트럼피즘 등장은 20세기 중반 유럽에서 위세를 떨쳤던 파시즘과 비교되고 있다. 특히 파시즘의 등장을 자본주의에 기반한 ‘시장사회’(market society)의 실패에서 찾았던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통찰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는 물론 반글로벌주의, 반이민주의, 보호무역주의라는 반작용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정책으로 극소수의 지배계층에게만 부가 집중되었고, 노동자 계층은 실직과 임금 동결이라는 고통만 떠안았다고 믿는다. 트럼피즘은 사회경제적 위기의 책임을 ‘타락한 기득권’에 있다고 비판하면서, 러스트 벨트의 백인 블루칼라 쇠락을 이민자 탓으로 돌리는 인종차별주의적 반이민 정서를 부추켰다. 이번 대선에서의 완승으로 2016년과는 달리 트럼피즘은 공화당 내에서도 명실상부한 주류 세력으로 자리매김하면서 그 정치적 위력은 더욱 막강해졌다.
물론 나름대로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파시즘에 비해 트럼피즘의 이념적 체계가 빈약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미국이 나치 독일처럼 세계대전을 일으키거나 인종학살을 할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다. 하지만 트럼프 2기가 끝난 후에도 국내외적 영향력은 한동안 지속될 것이다. 부통령으로 당선된 J.D 밴스와 같은 리틀 트럼프는 더 나올 것이고, 해외에서도 트럼프를 추종하거나 모방하는 세력이 늘어나면서 트럼피즘은 글로벌 현상이 될 것이다. 이미 헝가리의 빅토르 오반, 이탈리아의 조지아 멜로니, 네덜란드의 헤이르트 빌더르스 등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트럼프 당선에 환호하고 있다.
민주당은 2020년엔 반트럼프 연대로 가까스로 바이든을 대통령에 당선시켰지만 트럼프의 ‘미국우선주의’에 맞선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4년 후 참패했다. 1930년대 경제공황 이후 세계가 파시즘과 볼셰비즘으로 시련을 겪는 동안 미국은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으로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냈다. 과연 민주당이 트럼피즘을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이념과 리더십을 만들어낼지가 관건이다.
파시즘, 스탈리니즘, 마오이즘 등 반자유주의적 정치이념은 강력한 카리스마 지도자를 중심으로 탄생한 후 다른 나라로 세를 확장해 갔다. 트럼피즘 역시 글로벌 현상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한국도 이에 대한 중·장기적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미국발 돌풍에서 글로벌 태풍이 된 트럼피즘과 마주한 새로운 국가 생존전략이 필요하다. 맹목적인 동맹론이나 무책임한 제국주의 음모론을 넘어서는 보다 냉철한 현실에 기반한 전략이어야 한다. 글로벌 정치이념으로 진화하고 있는 트럼피즘은 정상 간 골프 회동이나 거래 등 단발적인 사고나 행위로 접근할 문제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