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사라졌고 '아빠'만 둘이다. JTBC 드라마 '조립식 가족'은 성(姓)이 다른 세 청년이 가족처럼 지내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혈연 중심의 전통적 가족 개념에서 벗어나 신뢰를 토대로 한 대안적 가족 형태를 보여줘 시청자들 사이 입소문을 타고 있는 이 드라마의 원작은 따로 있다. 유사 가족 소재를 자주 다루는 영미권 작품이 아니다. '조립식 가족' 엔딩 크레디트를 보면 '원작 중국 드라마 '이가인지명''이란 문구가 뜬다. 2020년 후난위성TV에서 방송됐던 중국 드라마를 한국 제작사가 리메이크한 것이다.
중국 콘텐츠가 한국 대중문화 시장을 점점 파고들고 있다. 기존엔 '철인왕후'(2020~2021) 등 중국 사극 위주로 국내에서 리메이크됐다면, 최근엔 현대극까지 리메이크가 확대되는 양상이다. '청설'을 비롯해 '상견니' 등 대만 청춘 영화와 드라마는 국내에서 그간 종종 다시 만들어졌지만, 중국 현대극이 한국에서 드라마로 리메이크돼 TV로 방송되기는 이례적이다.
중국 콘텐츠는 국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 이미 뿌리를 내렸다. 티빙 등에서 유통되는 중화권 콘텐츠는 800편 이상으로 3년 전과 비교해 약 2배 이상 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흐름은 중국 콘텐츠의 영향력이 세계 대중문화 시장에서 점점 커지는 것과 맞물려 있다. 중국에서 서비스가 금지된 글로벌 OTT 넷플릭스는 중국 유명 공상과학(SF) 소설인 '삼체'를 바탕으로 1억 달러가 넘는 제작비를 쏟아부은 미국 드라마 '삼체'를 지난 3월 공개했고, 수십 편의 중국 콘텐츠도 서비스하고 있다.
기성세대에게 중화권 드라마는 1990년대 KBS에서 방송돼 시청률 40%를 웃돌았던 '판관 포청천'처럼 긴 머리카락을 위로 말아 올린 남성이 전통 복장을 하고 나온 고전 사극 이미지가 강했지만, 요즘 10~20대에겐 다르다. 중국 현대극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20대 5명을 인터뷰해 보니 가장 좋아했던 중국 드라마로 공히 '치아문단순적소미호'(2017) 등 현대 청춘 로맨스물을 꼽았다. "3~4년 전 친구들 사이 중국 드라마 붐이 일어 '이가인지명' 등 15편을 몰아 보기 시작"(이모씨·22)했거나 "중학교 때 중국 소설을 즐겨보다 드라마까지 챙겨 보게 됐다"(임모씨·21)고 했다. 중국 드라마의 매력으로는 △대체로 이야기가 무거운 한국 드라마보다 가볍게 볼 수 있고 △'창란결'(2022) 등 한국에선 보기 어려운 신선물 등의 장르적 새로움을 들었다. △모계사회의 여성과 부계사회에서 자란 남성이 만나는 내용을 다룬 '전문중적진천천'(2020) 등 고전과 현대물이 섞인 세계관이 독특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미드(미국 드라마)족'이나 '일드(일본 드라마)족'처럼 수면 위로 드러난 열광적 소비 세력은 아니지만, 숨어 있던 소비층인 '샤이 중드(중국 드라마)족'의 등장에 국내 OTT 유통 풍경도 달라졌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올여름 발간한 보고서 '중국 콘텐츠 산업 동향-중국산 콘텐츠의 한국 시장 진출 현황 및 시사점'을 보면, 지난 4월 기준 티빙과 웨이브, 왓챠에 등록된 중화권 드라마는 각 800편을 모두 넘었다. 2021년 300~400편대였던 것과 비교하면 많게는 2배 이상 늘었다. 웨이브에 따르면, 올초 해외 드라마 중 중국 드라마 시청 점유율은 50% 이상을 차지했다. 한국일보가 티빙에 의뢰해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중국 드라마 시청 시간을 조사한 결과 3년 전인 2021년 동기 대비 261%가 증가한 것으로 확인됐다. 시청자들은 어떤 중국 드라마를 많이 찾아봤을까. 티빙에서 올해 가장 많이 재생된 중국 드라마 세 편은 '이가인지명'과 '너를 좋아해: 투투장부주'(2023), '장상사'(2023)로 조사됐다. '이가인지명'과 '너를 좋아해~'는 현대물이고, '장상사'는 옛 전통극 형식의 고장(古裝)극이다. OTT 관계자는 "서비스 업체 간 구독자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중드족'을 잡기 위해 중국 콘텐츠 서비스 확대가 이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한국과 중국의 문화 교류 불균형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중국비즈니스센터에 따르면, 2023년 2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이후 중국 TV와 OTT에 새로 공개된 한국 드라마(25일 기준)는 없다. 한류 콘텐츠 유통 제한령인 '한한령' 여파로 추정된다. 중국 콘텐츠 산업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올 초부턴 해외 영상물에 대한 리메이크 금지 지침도 내려진 걸로 알고 있다"며 "사실상 한국 드라마가 표적으로 현지 리메이크 제작도 멈춘 분위기"라고 말했다. 업계의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일각에선 한·중 문화 부처 장관이 지난 23일 중국에서 만나 양국 콘텐츠 교류를 두고 긍정적인 의견을 나눠 중국 내 꽁꽁 얼어 붙은 한국 콘텐츠 유통 시장에 변화가 생기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나온다. 윤호진 콘진원 중국비즈니스센터장은 본보에 "중국이 최근 실시한 한국 무비자 기간 연장과 내년 하반기 시진핑 국가주석의 방한 논의가 무르익어 내년 상반기엔 한국 대중문화 개방에 가시적인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 보고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