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유의 정치리더십 진공 상태

입력
2024.11.27 17:33
26면
지옥 문턱까지 간 불안한 국정지지율
‘트럼프 모델’밖에 없는 민주당 운명
이재명, 상황에 맞게 자신을 재창조해야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우리 헌정사에 여야, 보수·진보 양쪽이 지금처럼 동시에 리더십 붕괴 위기를 맞은 경우가 있었나. 신념에 찬 새로운 세력이 정권을 인수하고 시대정신을 구현하기는커녕, 대통령 임기 절반을 허비하고 ‘식물정부’ 소리를 듣기에 이르렀다. 국민과 국익에 대한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유례없는 압도적 다수당 대표가 재판 리스크에 정치운명이 걸려 차기 대선이 볼모 잡힌 상황 역시 국민이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현실이다. 윤석열 정부는 국정지지율이 19%(한국갤럽 기준)로 내려갔다가 17%를 찍고 다시 20%로 약간 반등했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국정운영이 어려운 단계로 추락한 뒤 ‘지옥 문턱’에서 살아나온 격이다. 대선 득표율(48%) 절반 이상이 무더기 이탈한 상태다. 전국으로 확산 중인 대학교수 시국선언의 골자는 탄핵이든 하야든, 임기단축 개헌이든 이대로 가선 안된다는 게 핵심이다.

그 이유는 너무나 명확하다.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제는 다른 어떤 국가와 비교해도 독보적 권력이다. 개인적으로 과장하면, 대통령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국민적 에너지만 모을 수 있다면 5년간 세계 10강에서 9위 이내 수준으로 도약할 수도 있다고 본다. 군사정권 시절이면 재벌그룹 하나쯤 망하게 하는 것도 가능한 초유의 권력이라고 본다. 윤 대통령 측이 초기 국정 성과로 내세운 건 대표적으로 두 가지였다. 한일관계 개선, 그리고 청와대 용산 이전 및 도어스테핑(출근길 문답) 같은 파격적 대국민 소통이었다. 둘 다 한계와 실패를 드러냈다. 시작부터 예상된 김건희 여사 리스크는 심각한 지경으로 현실화했다.

한일관계 복원을 취임 전부터 공개 강조하다 보니 일본에 대한 외교적 지렛대라곤 시작부터 제거한 마당이었다. 후쿠시마 오염수 대응, 정부 스스로 해결해준 강제징용 해법과 채워지지 않는 일본 측 ‘물컵의 반’, 최근 뒤통수 맞은 사도광산 추도식까지 어떤 정부도 국민에게 모멸감을 줄 권리는 없다. 정치 브로커 명태균씨와 김 여사의 친분은 사태를 대통령 부부 공천개입 문제로 키웠다. 이제는 윤핵관, 이준석, 오세훈에 이르기까지 범보수진영 자원을 위협하는 ‘물귀신’으로 비화했다. 여권 2인자의 리더십 위기는 어떤가. ‘국민 눈높이’를 말해온 한동훈 대표는 기세를 접은 뒤 당원 게시판 논란으로 난타당하며 권력투쟁 중이다.

여기에 민주당 상황을 가미하면 대한민국은 사실상 ‘정치 리더십 진공 상태’다. 이재명 대표의 위증교사 1심이 무죄로 끝났지만, 선거법 1심 재판에서 중형이 선고된 파장은 해결이 쉽지 않은 폭탄 상태다. 장외집회를 통한 정권퇴진 공세가 힘을 잃는 측면 역시 민주당 처지에 여론이 발목 잡힌 모순을 초래하고 있다. 현재대로 선거법 최종심이 나오면 이 대표의 대선 출마길이 막힌다. 대법원 확정판결 전 조기 대선이 치러져 당선된다면 ‘트럼프 모델’이다. 하지만 이를 돌파하기 위해 그 어떤 방법론이 창출되더라도 역풍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답이 없는 민주당엔 당분간 ‘시간’이 필요하다. 진영을 넘어선 공론화 과정이 될 수 있다. 심리적으로 상기된 친명계가 ‘내부 분열하면 죽인다’는 식으로 다그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재명 대표는 상황에 맞게 자신을 재창조해야 한다. 이 대표는 검찰의 선택적 기소 논란, 정권의 '권력기관 사유화' 또는 '내로남불' 피해자로서 야권 자체와 동일시돼 있다. 족쇄를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상당 기간 이재명 지지층은 야권의 주류로 살아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표는 거대담론에만 개입하는 재야 시절 DJ(김대중) 위치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어떤 역할이 부여될지도 국민과 여론에 달려 있음을 이 대표와 민주당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박석원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