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하를 건너 북쪽으로 향한다. 간쑤성 위중현(榆中縣)에 위치한 고진을 찾아간다. 30번 국도(G)를 씽씽 달린다. 동쪽 해안도시 장쑤성 롄윈강(連雲港)에서 카자흐스탄으로 넘어가는 국경도시 호르고스(霍爾果斯)에 이르는 도로로, 무려 4,258km라 한다. 약 80km를 달리다 22번 국도(G)로 갈아탄다. 칭다오에서 시작해 란저우 끝까지 겨우 1,873km다. 30km를 달려 요금소를 벗어나니 209번 성도(S)다. 내비게이션이 산길로 안내한다. 222번 향도(Y)다.
40km 거리를 꼬박 오른다. 이리저리 산허리를 도니 지루할 정도로 이어지는 황토 풍광이다. 산세에 적합한 다랑논이나 푸른빛 감도는 농작물이 스친다. 농촌 도로라 불리는 향도는 약칭이 X일 듯하다. 중국 도로는 5단계로 분류한다. 국도(GUO), 성도(SHENG), 현도(XIAN), 향도(XIANG), 촌도(CUN)다. 현도와 겹치니 Y를 쓴다. 제법 큰 마을인 궁징진(貢井鎮)에 도착한다. 어느덧 해발 2,500m까지 올랐다. 뜨거운 태양으로 냄비를 달구고 있다. 펄펄 끓이는 장면이 신기해 한참 바라본다.
다시 1시간을 오르내리다 고개를 넘는다. 황토 물든 땅을 감싸고 강물이 도도히 흐른다. 황하다. 청장고원에서 발원해 9개 성을 가로질러 발해에 이른다. 장장 5,464km다. 중화문명의 발원지, 민족의 젖줄 모친하(母親河)라며 존경한다. 당나라 시인 유우석이 남긴 감상이 떠오른다. 중국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에 실린 시다.
하산 도로도 꾸불꾸불하다. 양떼가 ‘보행자 우선’이라며 점령하고 있다. 경적을 울리면 놀라 어디로 튈지 모르니 위험하다. 동물이 가로막아도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 조심조심 옆으로 비켜 지나간다. 슬기로운 양떼도 슬며시 옆자리를 비운다. 황하 흐르는 소리가 조금씩 들린다. 황하 남단에 위치하고 천년 세월의 흔적이 남은 고진이 코앞이다. 송나라 인종 시기에 처음 성을 쌓았으니 딱 천년 지났다.
청성고진(青城古鎮)이다. 북송 명장 적청이 서북 전선에 왔다. 당항족이 세운 서하와 격전을 벌였다. 진주자사(秦州刺史) 시절 성곽을 쌓았다. 장군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지었다. 병졸로 종군해 무관 최고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 당시 문관인 포청천과 쌍벽을 이룬 영웅이다. 성황묘 광장에 말을 타고 긴 창을 잡고 있는 적청이 있다. 당시 장군의 집무실이었는데 청나라 옹정제 시대 성황묘로 중건했다.
성황묘 정전에 한대고충(漢代孤忠)이 새겨져 있다. 갑자기 한나라가 웬 말인가? 외로운 충신이라니 뜻밖이다. 초한 전쟁 당시 형양성에서 독 안에 든 쥐 신세인 유방을 살린 인물이 있다. 풍채와 용모가 비슷해 위기 탈출에 나선 기신이 주인공이다. 수천 명의 여인과 함께 변장 후 거짓으로 항복했다. 유방은 무사히 탈출했고 기신과 여인들은 살신성인했다. 성황신을 봉공하는 사당에 가끔 기신이 등장한다. 영웅을 동경하는 백성의 염원이다.
성황신은 고대부터 백성의 안전을 지키는 성곽과 해자를 수호한다. 두 마리 용이 기둥을 휘감고 있고 성황신이 좌정하고 있다. 서역 일대 관부를 관장하는 성황신의 위패가 많다. 마을에 전해지는 여러 전설을 벽면에 잔뜩 적었다. 일일이 살펴보지 않고 지나는데 낯익은 글자가 얼굴을 돌리게 한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민란 지도자 이자성이다.
이자성은 산해관을 넘어온 만주족 팔기군에 쫓겨 도피한다. 장강 남쪽 후베이의 구궁산(九宮山)에서 사망한다. 묘원도 있다. 민간의 영역은 역사와 다르다. 영웅은 전설 속에서 환생한다. 황하에 있는 청성에 은둔했다고 한다. 질만이(跌满尔)라는 놀이가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오고 있다. 청나라는 한자와 만주어를 양면에 각각 새긴 동전을 발행했다. 이자성이 아이들에게 장난을 쳤다. 동전 던지기 놀이 비슷하다. 만주어가 한자로 뒤집히면 이기는 놀이다. 청나라 통치를 전복하려는 뜻이라 한다. 정말 이자성이 왔을까? 고향 미즈(米脂)에 있는 이자성 관련 전시실 어디에도 ‘동전 던지기’ 전설은 없다.
서원이 공사 중이라 아쉽다. 인의지향(仁義之鄉) 패방을 지난다. 빈말이 아니다. 수도와 수 만리 떨어진 황하 마을에서 황제의 심복인 한림학사를 배출했다. 청나라 광서제 시대 진사에 급제하고 한림원 서길사(庶吉士)를 역임한 나경권이다. 황하 물길을 따라 장사로 부유해지자 서원을 세우고 자식 교육에 힘쓴 결과다. 진사 10명, 문과 및 무과 합격자 70여 명을 길러냈다. 황토 먼지와 황하 물살을 자양분으로 천년을 살아온 문화고진이다.
황하는 동북으로 흐르다 다시 서북으로 물줄기를 튼다. 황하 건너 북쪽으로 약 2시간 가면 다시 황하와 만난다. 드라마틱한 바위의 연출이 기다리고 있다. 징타이(景泰)에 있는 황하석림(黄河石林)이다. 공원 차량과 전동차를 연이어 타고 황하 앞에 내린다. 붉은 기운 풍기는 황토 사암에 낯익은 글자가 보인다. 이백의 장진주(將進酒)다. 황하의 물은 하늘에서 내려왔다(黃河之水天上來)는 시구가 적혀 있다. 권주가로 흥얼대지만 고루한 선비 문화를 꾸짖는 시다. 황하에서 읊으니 더욱 감동이다.
꽤 빠르게 달리는 유람선 타고 질주한다. 잔잔한 듯하나 물살이 빠른 편이다. 울퉁불퉁한 거대 암반이 가로막고 있다. 부두에 도착해 다시 전동차를 타고 석림 안으로 들어간다. 정확하게 말해 석림에 있는 협곡으로 파고든다. 황하를 보듬고 있는 관광지 석림은 10㎢로 아주 넓다. 지각운동의 영향으로 깎아지른 듯 험준한 절벽이 생겼다. 절벽 사이로 협곡이 형성됐다.
음마구대협곡(飲馬溝大峽谷)이라 한다. 말이 물을 마셨다는 도랑이었다. 예전에 졸졸 물이 흘렀던 듯하다. 지금은 메말라 전동차가 거침없이 달린다. 근거가 애매하지만 말 주인이 두 사람이다. 칭기즈칸과 현장 법사다. 정벌과 구법이니 행로가 달라도 한참 다르다. 누가 말에게 물을 먹였을까 궁금해진다. 계속 회전하며 달리는데 왼쪽 오른쪽 눈 돌릴 때마다 신기하고 신비한 조형의 연속이다. 매력 넘치는 작명의 이어달리기다.
협곡을 빠져나와 전동차에서 내린다. 1.2km나 되는 오르막 계단을 오른다. 가장 높은 지점에 전망대가 있다. 사방을 살피니 현란한 자연의 조화가 무한대로 드러난다. 가운데 능선에 만든 길이라 양쪽 아래에서 시원하게 바람이 솟아오른다. 길 오르는 사람들 뒤로 민둥산에 자란 나무가 마치 이끼처럼 달라붙어 있다. 절벽 옆이라 조심스레 걸어야 한다. 안전장치가 있어도 고소공포가 느껴진다. 바람이라도 힘차게 불면 몸이 붕 날 수도 있다.
전망대에 오르니 봉우리 숲이 발아래 펼쳐진다. 일정한 매뉴얼 없이 마음대로 조각했다. 세월을 잴 수 없는 자연의 조화다. 볼수록 매력에 빠지는 까닭은 그 어디서도 만나지 못한 경이로운 풍광 때문이다. 시선을 반대로 돌리니 황하가 보인다. 바위덩어리와 강 건너 울긋불긋한 단하 지형이 어울린다. 명불허전이 따로 없다. 시인이라면 어찌 황하를 노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하에 둘도 없는 기묘한 경관이라 자랑한다. 뻥 뚫린 가슴으로 그저 경외할 따름이다.
황하석림을 떠나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영태고성(永泰古城)으로 간다. 기원전 한나라 무제 시기 둔병을 실시했던 기록이 있다. 서역을 도모한 거점이었고 실크로드의 통로였다. 한참 허허벌판을 달리다 시야에 잡힌 고성 담장이 너무 반갑다. 명나라 만력제 시대인 17세기 초에 건축했다. 12m 높이에 둘레가 1,710m다. 동서로 520m, 남북으로 500m이니 거의 정사각형 모양이다. 밖으로 불룩하게 튀어나온 담장이 보인다. 봉화대가 있는 마면(馬面)이라 한다. 적군이 몰려들면 옆쪽에서도 방어하기 위해 제작했다. 고성 생김새가 거북이처럼 보여 귀성(龜城)이라 불렸다.
성문 앞에 용급해(用汲海)라 불리는 호수가 있다. 멀리 설산에서 흘러 고인 물이다. 양떼의 수원이다. 고성보다 높은 위치라 물이 자연스레 스며들어 주민의 용수가 된다. 고성 안 5개의 우물로 연결된다. 청나라 강희제 시대 명장인 악종기가 고안했다. 한가로이 풀을 뜯다가 물 한 모금 마시고 여유작작하는 양떼다. 파란 하늘이 호수로 내려앉아 더욱 푸르고 시원해 보인다. 1급 식수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이다. 호수가 있는 남문으로 들어간다. 방어를 쉽게 하기 위해 옹성으로 지었다. 두 번째 문도 살짝 비틀어서 세웠다. 안으로 들어서니 골목이 약간 내리막이다. 민가와 저택, 건축물이 대부분 흔적만 남았다. 우물도 사용하지 않은 채 그저 위치만 알려준다. 토담으로 지은 민가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다. 거주하기 어렵다. 대불사, 제신각, 옥황전의 신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남쪽 관제묘와 북쪽 성황묘도 고요하다.
고성 복판에 민국 시대 중건한 초등학교가 있다. 원래 지휘부였는데 지역 유지가 1920년에 초등학교를 세웠다. 입구 지붕에 파도가 물결치며 해를 떠받드는 조각을 했다. 섬궁절계(蟾宮折桂)를 상징한다. 두꺼비가 사는 궁전은 과거 시험장이고 계수나무를 꺾는 일이니 급제한다는 뜻이다. 변방 학교였으나 학구열이 다를 수는 없다. 교실을 개조한 전시실에 악종기 부대의 진군 장면이 있다. 금방 발생할 일인 양 생생하다.
방목으로 살아가는 주민이 조금 남았을 뿐이다. 숙식이 가능한 객잔이 몇 군데 있다. 인적 드물고 삭막한 분위기지만 구름처럼 그저 쉬어가도 좋을 듯하다. 하늘은 왜 이다지도 파랗게 물들었는가. 칠흑의 밤에 살아나는 별빛을 위한 도화지 같다. 손을 들면 잡힐 듯한 은하수도 보일까? 견우와 직녀의 집은 어딜까? 해 지거나 뜰 때마다 고성 문 들고나는 양떼의 속도로 느리게 머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