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도시 장흥’. 장흥 읍내로 통하는 국도 중앙분리대에 일렬로 세운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인다.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한강에 대한 헌사다. 작가가 자신의 이름을 딴 기념관이나 문학관 설립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밝혔음에도, 한강에 대한 장흥군의 짝사랑은 그치지 않을 듯하다. 읍내에서 약 27㎞ 떨어진 천관문학관 외벽에도 ‘어머니의 품 장흥에 뿌리를 둔 소설가 한강, 한국인 첫 노벨문학상 수상’ 경축 현수막이 커다랗게 내걸렸다. 마치 ‘한강의 발원지는 장흥’이란 선언처럼 보인다.
한강은 부친이자 소설가인 한승원(85)이 교직 생활을 할 당시 광주에서 나고 자랐다. 한승원은 장흥 회진면에서 태어나 현재 안양면에 ‘해산토굴’이라는 집필실을 마련해 부인과 함께 지내고 있다. 장흥의 ‘한강 앓이’는 2019년 작가가 맨부커상을 수상하며 시작됐다. 장흥 출신 문인과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천관문학관은 그때부터 한강에게 전시관의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로비 벽면에는 한강의 작품이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 이승우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부친에게 보낸 어버이날 감사 편지도 사본으로 붙여 놓았다. 한강과의 인연이라면 한 조각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하다. 전시관 안에도 한강이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작가 연보와 함께 대표작 ‘소년이 온다’와 ‘채식주의자’ 소개가 벽면 하나를 장식하고 있다.
천관문학관이 설립된 건 한강이 오늘날처럼 이름을 알리기 훨씬 전인 2008년이다. 남해 끝자락에 우뚝 솟은 천관산(723m) 자락에 문학관이 들어선 건 장흥 문학의 뿌리가 그만큼 깊고 넓기 때문이다.
첫 자리는 조선 명종 때 문인 기봉 백광홍(1522~1556)이 차지하고 있다. 그의 ‘관서별곡’은 국내 기행가사의 효시로 평가된다. 정철의 ‘관동별곡’보다 25년이나 앞선 것으로, 평안도평사에 제수되어 출발하는 것부터 부임지를 순시하기까지의 노정을 운치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전시의 중심은 장흥 출신으로 이름을 날린 소설가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 이승우다. 이청준과 한승원 생가는 문학관에서 불과 10km 정도 떨어져 있다. 특히 두 작가는 고향에서의 기억과 풍광이 문학의 자양분이었음을 숨기지 않는다. 이청준의 소설 ‘눈길(1977)’에 등장하는 산길과 삼거리는 실제 고향 진목마을과 대덕읍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굽이굽이 외지기만 한 그 산길을 저 아그 발자국만 따라 밟고 왔더니라. 오목오목 디뎌 논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 돌아왔제.”
한승원도 '안개바다(1979)' 후기에서 “나는 내 살과 뼈를 키워 준 바다와 섬과 거기에 내린 안개와 이슬에 대하여 늘 고맙게 생각한다... 갯벌물 뒤집어쓰고 짱뚱어 뛰듯 하며 사는 내 형제와 이웃들의 삶을 사랑한다”고 했다. 한강의 수상 소식이 전해지기 전까지 문학관은 이승우(65)를 노벨상 수상이 유력한 작가로 소개해 왔다. 문학관이 소재한 관산읍 출신으로, 특히 프랑스 문단과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아 온 작가다.
문학관 뒤편 산자락에는 천관산문학공원이 조성돼 있다. 정상에서 문학관까지 산줄기가 가파르게 쏟아지는데, 겨울에도 상록활엽수로 푸르른 남도의 다른 산과 달리 소나무가 많다. 이를테면 빼어난 산세에 비해 식생이 부실한 편인데, 문학공원은 이를 만회하려는 지역민의 노력으로 조성됐다. 대덕읍 주민들은 천관산을 남도의 명승지로 가꾸고자 매년 수천 그루의 단풍나무를 심고, 3㎞ 등산로에 돌탑 400여 개를 쌓았다.
문학관에서 문학공원까지 1.5㎞는 차로 쉽게 오를 수 있다. 문학공원은 주차장 주변에 조성돼 있다. 지그재그 탐방로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50여 시인, 소설가, 수필가의 문장을 새긴 바위가 늦가을 단풍과 어우러져 있다. 문학의 숲이자 글의 향연이다. 국내 유명 작가의 글에서 정수만 골랐으니, 누구라도 자신의 심정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글귀 하나쯤은 발견할 수 있다.
천관산 등산도 이곳부터 시작되는데 탑산사를 거쳐 정상까지는 약 2㎞, 길이 험하고 가팔라 2시간은 잡아야 한다. 대안으로 500m 위쪽 닭봉까지만 올라도 장쾌한 조망을 즐길 수 있다. 역시 경사가 심해 오르는 데만 20분 이상 걸린다. 닭 머리 모양 바위 봉우리에 서면 탑산사를 중심으로 천관산 줄기가 우람하게 펼쳐진다. 남쪽으로는 넓은 간척지 뒤로 다도해가 아른거린다. 능선은 이미 갈색으로 변해가는데, 산 아래 들판은 푸릇푸릇하다. 글 줄기 흐르는 문학의 골짜기가 서서히 겨울로 접어들고 있다.
장흥군은 천관문학관에서 해산토굴까지 주요 명소를 연결해 ‘득량만 소설길’로 이름 붙였다. 이청준의 소설에 등장하는 대덕읍삼거리, 그의 묘소인 이청준 문학자리, 진목마을 생가, 소설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 배경인 선학동마을, 한승원의 고향 회진포구와 정남진전망대, 이승우의 단편 소설 ‘샘섬’ 배경지, 이청준의 소설 ‘축제’와 동명의 영화 배경인 소등섬, 수문해수욕장 부근 한승원문학산책로를 거치는 길이다. 걷기에는 턱없이 먼 거리라 차로 주요 지점을 돌아볼 수 있다.
옛 장흥교도소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화인에게는 유명한 곳이다. 2015년 새 교도소가 마련된 후 문을 닫은 교도소는 2019년부터 드라마, 영화 촬영지로 개방하며 지금까지 70여 편을 찍었다. 교도소가 등장하는 웬만한 작품은 모두 찍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촬영장으로 인기를 끈 배경은 실물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 재소자들이 실제 거주한 방과 작업장, 이들이 오가던 긴 복도, 5개의 감시탑 등은 실감 나는 영상을 원하는 이들에게 최적의 조건이다.
촬영장으로만 활용되던 이 교도소가 12월 말 ‘빠삐용집(Zip)’이라는 명칭으로 일반에 개방될 예정이다. 민원봉사실은 장흥교도소 아카이브로, 직원식당은 교정역사전시관으로 새로 단장했다. 교도관 체력단련장인 연무관은 ‘영화로운 책방’, 여사동은 작가들을 위한 ‘글감옥’으로 변신한다. 장차 ‘감옥당’ 빵집과 ‘호텔 프리즌’도 문을 열 계획이다.
영화 주인공 빠삐용은 프랑스어로 나비라는 뜻이다. 빠삐용집은 억압과 구속으로부터 변신하고 해방을 꿈꾸는 자유 존재에 대한 은유다. 김영현 옛 장흥교도소 문화재생사업단장은 "세상이 감옥 같고, 삶이 형벌 같을 때 사색과 해방의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빠삐용집과 함께 가볼 곳으로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있다. 장흥은 동학농민혁명의 최후 격전지다. 기념관 앞 석대들에서 1894년 12월 남도까지 밀려난 동학농민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일본군 및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현재까지 밝혀진 전사자만 345명, 실제로는 1,500명 이상의 농민군이 이 전투에서 숨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념관에는 당시의 기록과 무기 등이 전시돼 있고, 영상과 체험 시설로 현장을 실감할 수 있도록 꾸몄다. 22세 여성농민군 지도자 이소사, 13세 소년 장수 최동린, 농민군을 피신시킨 열여섯 소년 뱃사공 윤성도 등의 사연에 가슴이 뭉클하다.
장흥의 문인들이 이에 무심할 리 없다. 송기숙의 ‘녹두장군’, 이판식의 ‘탐진강’, 한승원의 ‘동학제’는 공통으로 동학농민혁명을 다루고 있다. 기념관에 작품 소개와 함께 작가의 관점을 전시해 놓았다. 한승원은 “동학은 먼바다에서 시작하여 고부와 전주, 공주 우금치까지 뻗어 갔다가 다시 바다로 되돌아왔다”고 언급했다.
인근 정남진편백숲우드랜드는 장흥의 대표 관광지다. 무장애 산책로를 걸으며 한겨울에도 푸릇푸릇한 기운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면 정남진천문과학관의 별보기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도 권할 만하다.
장흥의 겨울 별미를 꼽자면 단연 ‘굴구이’다. 득량만에서 채취하는 굴은 이듬해 2월까지가 제철이다. 소등섬이 위치한 용산면 남포마을과 관산읍 고마리 해안에 굴구이식당이 여럿 있다. 솥뚜껑보다 큰 불판에 싱싱한 굴을 잔뜩 올려서 구운 후, 껍질이 열리면 탱글탱글한 알을 꺼내 먹는다. 상에 장갑과 칼이 준비돼 있다. 굴무침, 굴전, 굴라면도 별미다.
홍어삼합에서 차용한 ‘장흥삼합’은 지역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지역 특산물인 키조개 관자와 표고버섯, 한우의 조합이다. 바다, 산, 들판의 먹거리가 어우러졌으니 맛이 없을 수 없다. 읍내 정남진 토요시장에 장흥삼합 식당이 많다. 정육점에서 쇠고기를 별도로 사오면 상차림 비용을 따로 받는 식이다. 장흥삼합은 사합, 오합으로 진화하고 있다. 읍내 신가네 식당은 낙지나 주꾸미를 더한 삼합이 주메뉴다. 전골냄비에 채소와 함께 푸짐하게 담아 회로 한 번, 익혀서 또 한 번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