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장준하 선생이 내 몸 빌려서..." 55년 만에 재창간되는 지식인들의 잡지 '사상계'

입력
2024.11.27 10:30
22면
한국 현대 지식 문화사에 한 획
박정희 정권, 1970년 폐간시켜
제호·판형 그대로… 내년 2월 재창간

한국의 1950~1960년대 지성계를 대표한 잡지 '사상계'가 폐간 55년 만인 내년 2월 재창간한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로 의문사한 장준하(1918~1975) 선생이 "독립운동 하는 심정으로" 만들었던 잡지다. 당시 "사상계를 끼고 다니지 않으면 대학생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지식인 잡지' 대접을 받았으나 김지하의 권력 풍자시 '오적'을 실었다는 이유로 1970년 5월호를 마지막으로 박정희 정권이 폐간시켰다.

"기후위기, 팬데믹, 인공지능, 신냉전, 양극화 등으로 인류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사상계가 다시 등판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사상계의 새 발행인으로서 재창간을 주도하는 장호권(75) 장준하기념사업회 회장은 25일 한국일보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장준하 선생의 맏아들이다. 장 회장은 "어지러운 세상이 장준하 선생을 다시 소환했다"면서 "내 몸을 빌려드리겠다는 생각으로 복간에 나섰다"고 했다.

왜 지금 장준하와 사상계인가

장 회장은 1975년 선친의 의문사 이후 생명의 위협을 받고 해외를 떠돌다 2004년 영구귀국해 사상계 복간을 추진했다. 2007년 복간준비호도 냈지만 "현실을 몰라 실패"했다. 원고료 지급도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이후 장준하 선생의 암살 의혹 규명에 매달리면서 사상계 복간은 미뤄뒀다.


사상계 복간 논의가 다시 시작된 건 지난해 말부터다. 장 회장은 "사상계는 한국 근대사 격동의 순간에 민족문화를 표방하고 등장해 자기 소임을 다했다"며 "다시 나라가 위기에 처한 지금 이 시대가 다시 사상계와 장준하 선생을 필요로 한다"고 강조했다.

2025년판 사상계의 명예발행인에는 '장준하'란 이름 석 자가 올라 있다. '따뜻한 진보와 아우를 줄 아는 보수'라는, 장준하 선생이 지향했던 신념도 계속 이어진다. 장 회장은 "집을 지키는 진정한 보수와 집이 더 잘 살도록 뛰어다니는 진보가 한 집안에서 움직여야 하는데 지금은 완전히 따로 논다"며 "사상계는 양 날개를 잘 지탱해주는 몸통 역할을 지향할 것"이라고 했다.

미래세대 위한 '문명전환종합지' 표방

사상계는 과거 판형과 제호 그대로 돌아온다. '문명전환종합지'를 표방한다. 각 분야 전문가들로 편집위원단 48명이 꾸려졌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와 윤순진 서울대 교수, 박명림 연세대 교수, 이정옥 전 여성부 장관,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가나다 순) 등이 참여한다. 20대부터 70대까지 세대뿐 아니라 남녀 성비도 안배했다. 과거 사상계 편집위원 중에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내년 2월 나올 재창간 1호인 봄호(통권 207호)는 '응답하라 2025'를 주제로 한 특집기획호다. 해방 80주년, 한일 수교 60주년인 2025년에 대한 진단과 과제를 담는다는 게 편집인을 맡은 장원 농촌유토피아연구소 대표의 설명이다. 장 대표는 "복간 사상계는 생태적 교양종합지로 미래세대의 등불이 되는 잡지를 지향한다"며 "아날로그와 디지털, 여성과 남성, 자연과 인간, 매거진과 웹진이 함께 융성하는 세상을 위해 기꺼이 종이잡지로서의 역할을 감내할 것"이라고 했다.


사상계는 내년 한 해 계간으로 선보인 후 2026년부터 격월간으로 발행될 예정이다. 복간 사상계가 궤도에 오른 후에는 장준하기념관 건립도 추진한다. 장 회장은 "반민족 세력인 이승만·박정희 기념관에 맞서는 정통 민족주의자인 장준하 선생의 기념관을 범국민 모금운동을 통해 현재 묘역이 있는 경기 파주의 장준하 공원에 지을 계획"이라고 했다. 궁극적으로는 장준하기념사업회에서도 손을 떼고 사회에 내놓는 게 그의 목표다. 가족이 기념사업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에서다. "나에게도 '장준하 아들'이 아닌 내 이름으로 살 날이 오겠죠."

사상계 재창간을 위한 후원의 밤 행사가 오는 29일 서울 종로구 서울의대 동창회관인 함춘회관에서 열린다.

권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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