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방관자로 남지 않기로 했습니다. 한국 축구의 새로운 100년을 만드는 유쾌한 도전을 시작하겠습니다."
허정무(69) 전 대전하나시티즌 이사장이 제55대 대한축구협회장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하며 추락한 축구협회의 위상을 다시 일으키겠다고 밝혔다. 홍명보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 선임 과정에서 절차적 문제 등 각종 논란의 중심에 선 정몽규 현 축구협회장의 4선 도전이 유력한 가운데 그에 대한 대항마로 떠오를지 귀추가 주목된다.
허 전 이사장은 25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축구협회장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모두가 축구협회의 환골탈태를 바라지만 거대한 장벽 앞에서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며 "그래서 방관자로 남지 않고 누군가는 이 추락을 멈춰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작은 밀알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출마 이유를 밝혔다. 축구협회장 선거는 내달 25일부터 사흘간 후보자 등록이 진행된 뒤 내년 1월 8일 예정돼 있다.
그는 이어 "40년 만에 올림픽 본선 무대도 밟아보지 못하고 예선에서 탈락했고, 깨끗하지도 투명하지도 정의롭지도 못하다"면서 "축구협회의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운영 체계는 시스템의 붕괴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앞서 황선홍 감독이 이끌던 23세 이하(U-23) 축구대표팀은 파리 올림픽 예선을 겸한 아시안컵 8강전에서 신태용 감독이 지휘한 인도네시아에 승부차기 끝에 패해 탈락했다. 당시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을 경질한 축구협회는 황 감독이 A대표팀 임시 감독을 겸임하도록 해 논란이 됐다. 결국 한국은 10회 연속 올림픽 진출에 실패하며 국민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겼다.
허 전 이사장은 이에 "팬들의 질타와 각계각층의 염려, 무엇보다 선후배 동료 축구인들의 갈등을 볼 때면 많이 괴로웠다"며 "어쩌다 한국 축구가 이렇게까지 됐나라는 한탄과 함께 축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께 죄송했다. 고개 숙여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늘날 불투명하고 미숙한 행정의 연속, 잘못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으려는 부끄러운 행동으로 축구협회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고 한국 축구는 멈춰 있다"며 "위기와 실망을 극복하고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투명하고 공정한 시스템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축구협회는 지난 7월 홍명보 감독을 선임하는 과정에서 절차적 정당성 문제가 불거지며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지난 9월 정몽규 회장과 홍 감독은 국회로 불려가 국정감사 질의를 통해 "동네 계모임보다도 못하다" 등 의원들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결국 문화체육관광부는 축구협회를 감사한 결과 홍 감독 선임에 절차적 하자가 있다며 "축구협회의 위법·부당한 업무처리 등 책임을 물어 정 회장의 자격정지 이상의 징계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스포츠윤리센터도 정 회장이 협회 수장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직무태만'에 해당한다며 문체부에 징계를 요구했다.
이에 따라 4선 도전이 유력한 정 회장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는 게 사실이다. 축구 팬들은 정 회장의 4선 도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축구협회 노조도 "무지하고 무능한 정 회장의 불출마 선언이 한국 축구 위기를 수습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성명서를 냈다.
허 전 이시장은 1980년대 PSV에인트호번(네덜란드) 등 국내외에서 선수생활을 한 뒤 지도자와 행정가로 변신해 활동했다.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당시 대표팀 사령탑으로 한국의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을 이뤘다. 2013년부터 축구협회 부회장, 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를 지냈고,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대전하나시티즌 이사장으로 재직했다.
허 전 이사장은 "한국 축구는 지금, 이 순간만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미래 100년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다. 저는 한국 축구를 위해 모든 걸 쏟아부으려 한다"며 "지금도 외부 압박을 받고 있으나, 귀담아듣지 않고 도전하겠다. 또 이영표, 박지성 등 똑똑하고 유능한 후배 축구인들이 책임감 있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