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집단 구성원들은 결코 알지 못할 위험이 존재한다. 결코 알지 못할 안전의 정도가 있다. 백인들은 미국에서 흑인으로 살아가는 것의 위험성, 그 구조적인 기회 불평등과 인종적 프로파일링, 끝도 없는 경찰 폭력의 위협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남성들은 미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의 위험성, 성추행과 성폭력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이성애자들은 동성애 혐오를 경험한다는 게 뭔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미국 베스트셀러 작가 록산 게이(50)는 "악취 나는 불평등을 직면하고도 아무 말 하지 않는 건 용납할 수 없"어서 이렇게 썼다. 아이티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흑인 여성인 그는 계속 쓰고 또 썼다. 그렇게 지난 10년간 미국 뉴욕타임스(NYT), 영국 가디언 등에 쓴 칼럼 중 직접 고른 66편을 엮어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는 제목의 책으로 펴냈다.
치열하고 솔직하게 쓴 게이의 글은 '지금 여기 한국'에 적용해도 무리 없다. 그는 2015년 11월 13일 자 NYT에 미국 미주리대에서 인종차별에 항의하며 벌어진 학내 시위를 기록했다. 당시 '안전한 공간'을 요구하는 시위 학생들을 향해 비난 여론이 고개 들자 그는 썼다. "안전한 공간이라는 발상을 조롱하는 이들은 안전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위치인 경우가 많다. (…) 안전을 당연시하는 자들은 안전 역시 다른 많은 권리가 그렇듯 자기들이 빼앗긴 적 없는 권리이기에 폄하한다." 최근 남녀공학 전환을 둘러싸고 역시 안전한 공간에 대한 논의가 열띤 동덕여대 사례를 갖다놔도 말이 된다.
"의견이 있는 여자"라서 화가 많다는 비난을 자주 받는다는 게이는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좀 마'라는 말 또한 곧잘 듣는다. "누구를 위해 둔감해지라는 것인가?" 그는 묻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고 답한다. "조롱받는 자가 둔감할수록 공격하는 자들은 멋대로 지껄이고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종·젠더·성소수자 등 정체성 정치 이슈는 게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화두다. 정치적 존재이기 전에 우리 모두 인간일 뿐이라며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게이는 "그런 주장도 사실 정체성 정치"라며 "인구 구성이 계속 변하는데 백인들이 자기들 제국의 잔재에 방화벽을 쌓으려 애쓰는 것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정체성 정치"라고 일갈했다. 정체성 정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재집권이라는 큰 벽에 부닥친 상태다.
트럼프 당선자를 "대통령은 물론 어떤 공직도 맡을 자격이 없는 남자"라고 했던 게이는 "이제 어떡하지?"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트럼프 당선자가 조 바이든 현 대통령에게 패배한 2020년 대선 직전 게이는 이렇게 썼다. "나는 미래가 어떠하든 그 미래를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당신은 어떤가?" 그는 "희망 말고 가능성에 대해 계속 생각한다"며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상상함으로써 아주 작은 행동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삐 풀린 낙관주의보다는 현실주의" 쪽이 그의 자리다. 책은 세간사로 속 시끄러울 때 어느 장이라도 펴서 읽기 유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