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계 구심점을 자임하며 출범한 대한의사협회(의협) 비상대책위원회가 수능시험까지 끝난 상황에서도 내년 의대 증원 백지화 주장에 매몰돼 있어 의료계 내부에서 불만이 커지고 있다. 사회적 대화는 무시한 채 현실적으로 무리한 요구만 반복해 협상 타이밍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전공의 복귀 방안 마련은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비판도 나온다.
의협 비대위는 21일 오후 첫 회의를 열고 향후 활동 방향을 논의했다. 박형욱 의협 비대위원장을 공개 지지한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비대위원장을 포함해 전공의 3명, 의대생 단체 추천 3명도 비대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앞서 박형욱 위원장이 취임 기자회견에서 “정부가 의대 증원 재검토를 수용하지 않으면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밝힌 점으로 미뤄 여야의정 협의체 합류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박단 위원장도 연일 여야의정 협의체를 비판하면서 내년 의대 모집 중지를 요구하고 있다.
의료계에선 의협 비대위의 비타협 강경 기조를 우려하는 시선이 적지 않다. 의대 증원 백지화 요구에 모든 의사가 동의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내년 의대 정원은 이미 확정돼 돌이키기 힘든 현실을 의사들만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의사인력수급추계기구를 꾸려 2026년 정원부터 재논의하자고 제안한 상태다.
서울 지역 A수련병원 교수는 “의협과 대전협은 대체 언제까지 의대 증원 문제만 물고 늘어질 건지 답답하다”며 “정부의 백기투항을 받아내면 사태가 모두 해결되나. 수험생이 겪을 혼란과 피해는 무시해도 된다는 말인가”라고 질타했다. 이어 “의료계는 증원 근거가 없다고 정부를 공격하지만 의료계도 9개월이 넘도록 증원을 철회해야 하는 근거를 내놓지 못한 건 마찬가지”라며 “이런 대치가 계속된다면 내후년 입시 때도 똑같은 논쟁이 되풀이될 것”이라고 말했다.
의대 증원 백지화를 주장하더라도 장외가 아닌 협상장에 나와서 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B수련병원 사직 전공의는 “대화가 곧 협상 타결이 아닌데도 자신의 주장을 상대가 받아줄 때까지 비토만 하는 건 유아적인 떼쓰기에 불과하다”며 “일단 대화라도 해야 더 적게 잃고 더 많이 얻어낼 수 있지, 대화 자체를 차단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고 비판했다.
사직 전공의들 사이에서도 여야의정 협의체 참여를 비롯해 정부와 협상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지만 박단 위원장이 워낙 강경해 다른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은 분위기라고 한다. B전공의는 “이제는 전공의 복귀 방법,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의학교육의 질 확보 등 의대 증원보다 훨씬 더 중요한 현안들을 논의해야 할 때”라며 “이러다 정부와 협상할 타이밍을 놓칠까 우려된다”고 했다.
대학병원 관계자들에 따르면 특히 레지던트 3, 4년 차 전공의들 사이에서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전문의 취득을 눈앞에 앞두고 1년을 통째로 쉬었는데 내년 3월 복귀하지 못하면 남자는 입대해야 해 공백기가 더 길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달부터 각 수련병원들은 예년처럼 전공의 모집 공고를 낼 예정이다. 전공의 수련 규정상 중도 이탈 시 1년 이내 동일 과목, 동일 연차 복귀가 불가능한데, 사직 전공의들은 사직서 수리금지 명령이 철회된 6월 초 사직 효력이 발생해 정부가 특례를 제공하지 않으면 내년 3월 복귀가 불가능하다. C수련병원 사직 전공의는 “‘의대 증원 백지화=전공의 복귀’는 아니다”라며 “의협과 대전협은 전공의 복귀 로드맵부터 정부와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