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드라마 '정년이'에 출연한 신예은(26)과 '정숙한 세일즈'에 나온 김성령(57)에겐 공통점이 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사회적 금기를 넘어선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것. 신예은은 1950년대 여성국극단 연구생 허영서 역을 맡아 남장을 한 채 판소리를 했고, 김성령은 1990년대 남편 뒷바라지만 하던 주부 금희 역을 맡아 여성용 전동 자위 기구를 팔았다. 가부장적 사회 구조에 맞서 꿈을 향해 달려가고, 당당하게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해방감을 느낀다"며 대리만족했다. 조명을 받기까지 두 배우에겐 역경이 따랐다. 신예은은 성대가 상해 병원까지 다니며 1년 동안 판소리를 배웠다. 파격 소재에 김성령은 "이게 방송될 수 있을까요?"라고 감독에게 묻고 또 물었다. 드라마 종방 후 두 배우를 따로 만나 '반란의 여정'을 들었다.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청록색 도포에 갓을 쓴 이가 판소리 '춘향전' 중 이몽룡이 부르는 '사랑가' 소절을 구성지게 불렀다. 남성 명창이 아니다. 반전의 주인공은 드라마 '정년이'에서 영서를 연기한 신예은. 그가 구레나룻을 붙이고 남장을 해 무대에 서는 횟수가 늘수록 시청자의 감탄도 커졌다.
신예은은 하루에 많게는 9시간 동안 판소리를 연습했다. 반복되는 고음 연습으로 드라마 속 정년이(김태리)처럼 성대가 상해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떡목'도 경험했다. 20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병원에 갔더니 '당분간 연습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며 목소리가 안 나오는 걸 직접 경험하니 혼란스러웠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더 큰 장벽은 무대에서 떨지 않고 노래하는 것이었다. 그는 "보기와 달리 제가 'I'(성격 유형 검사 MBTI 유형 중 '내향형')라 긴장을 엄청 많이 한다"며 "어떻게든 긴장을 푸는 법을 배우고 싶어 소속사 사무실을 찾아가 직원분들 일하는데 '사랑가'를 부르기도 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무대에 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영서가 신예은에겐 친숙했다. 예고를 나와 대학에서 연기예술학을 전공한 그에게 배역을 따내기 위한 경쟁은 학창 시절 일상이었다. 그는 "영서처럼 '2인자'였던 때가 많았다"고도 했다.
신예은은 드라마 '더 글로리'(2022~2023)에서 학교폭력 가해자인 박연진의 아역을 맡아 얼굴을 알렸다. 연진이로 카메라 앞에 선 뒤 "악몽"을 꿨던 그는 영서를 만난 뒤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드라마 촬영 사진과 함께 "세상의 모든 영서 화이팅"이란 글을 올렸다. "영서는 정년이의 실패에 안도하는 대신 경쟁 상대의 성공을 보고 기뻐하며 자존감을 끌어올리잖아요. 그 모습을 닮고 싶어요."
"파워풀 매직스틱 피메일." 드라마 '정숙한 세일즈'에서 여대 영문과 출신 금희(김성령)는 영어로 쓰인 제품 설명서를 이렇게 또박또박 읽었다. '여성에게 강력한 마법 막대기'라고 그가 동네 주부들에게 뜻을 설명해 준 제품은 바이브레이터다. 배경은 1992년 가상의 지역인 금제. 드라마 제목처럼 여성에게 '정숙'이 강요되던 시절, 금희는 성인용품을 방문판매 하며 여성의 성욕을 드러내고 사회적 편견에 맞섰다. 남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몸과 욕망을 긍정하는 그의 모습에 시청자도 푹 빠졌다. "춘천 사는 동생을 만났는데 '동네 사우나에서 난리야'라고 하더라고요. 여성분들이 '성인용품 가게 우리도 가볼까?'라면서요. 뿌듯하더라고요." 지난 17일 드라마 종방 직전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난 김성령의 말이다.
김성령은 대본을 받고 "보육원 봉사에서 만난 아이들이 떠올랐다"고 했다. 그는 "성과 출산을 숨어서 얘기하고 해결하려 하다 보니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라며 "이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성문화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건전하게 함께 얘기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고 출연 계기를 들려줬다.
김성령은 1988년 미스코리아 '진' 출신이다. 젊은 시절 영화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1991) 등에서 화려한 배역을 주로 맡았던 그는 중년 이후 연기 궤적을 확 바꿨다. 드라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2021)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역을 맡아 정치를 풍자했고, 범죄 누아르 영화 '독전'(2018)에선 마약 밀매 조직의 실세를 연기하며 일그러진 모습을 보여줬다. 다음 작품에선 총을 잡는다. 그는 "'정숙한 세일즈'에서 화장실 대걸레를 손으로 쥐고 물 쫙 빼는 게 평소 내 모습"이라면서 "도전적이라 먼저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