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패밀리 레스토랑 'T.G.I.프라이데이스(이하 티지아이)'의 파산 소식이 들려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미국의 뉴스라는 사실이다. 나 같은 1970년대생, 소위 'X세대'라 분류당하는 연령대에 티지아이는 추억의 지분을 상당히 가지고 있다. 마땅한 양식 외식 공간이 없었던 1990년대 중반 등장해 한국에 패밀리 레스토랑을 유행시켰다.
그런 티지아이가 파산을 하다니 미국에 한정된 이야기라고 해도 나름 충격적이었다. 관련 기사를 찾아 읽어보니 상당히 흥미로웠다. 많은 이들이 댓글란을 통해 자신의 티지아이 근무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19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경험담들은 한결같이 "힘들었지만 정말 보람차고 즐거운 직장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2000년대에 미국을 경험하면서 내가 겪었던, 질 낮은 프랜차이즈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티지아이의 역사는 196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앨런 스틸먼이라는 남성은 젊은 여성들이 밀집한 뉴욕 맨해튼의 이스트사이드에 살고 있었다. 스틸먼은 이런 환경 속에서 이성을 만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지만 곧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20, 30대 여성들이 남성과 함께 적당히 술을 마시며 어울릴 만한 공간이 없다는 점이었다.
맨해튼이니 널린 게 술집이었겠지만 전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비공개로 초대를 받아 참석하는 칵테일 파티도, 맥주를 홀짝거리는 바도 모두 남성 천지였다. 스틸먼은 이런 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자신이 원하는, 여성이 편하게 찾아와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을 직접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자신이 모은 5,000달러와 어머니에게 빌린 5,000달러를 합쳐 동네의 단골 바 '굿 태번'을 인수했다. 요식업 경험이 전혀 없는 가운데 내린 결정이었다.
스틸먼은 굿 태번의 상호를 T.G.I.프라이데이스로 바꾸었다. 대학 시절 입버릇처럼 써 왔던 표현 '주님, 감사합니다. 금요일이군요!(Thanks God It’s Friday!)'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렇게 1965년 3월 15일 티지아이 1호점이 맨해튼에 문을 열었다. 햄버거나 치킨윙 같은 미국풍 바 음식과 각종 주류를 구비한 가운데, 식재료의 질과 음식의 완성도에 주력한다는 방향을 세웠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빨간색과 흰색이 사선으로 교차하는 줄무늬 바탕의 로고에 요란한 느낌의 인테리어가 분위기를 잡는 티지아이의 초창기 전략은 의류 브랜드 애버크롬비앤드피치와 흡사했다. 운동을 많이 해 잘 다듬어진 몸을 으스대는 전형적인 백인 젊은 남성들을 접객원으로 고용했다. 손님의 생일이면 접객원들이 다 모여 축하 노래를 부르며 케이크를 대접하는, 우리에게도 알려진 특유의 문화도 이때 이미 나왔다.
스틸먼 본인의 주장이므로 조금은 걸러 들어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티지아이는 미국 최초로 여성들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음주 공간이었다. 당시 모든 음주 공간이 남성의 전유물이었으니, 여성들은 집에 모여 술을 마시는 등 선택권이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던 현실을 티지아이가 바꿔, 여성들이 혼자서도 들어와 먹고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는 게 스틸먼의 주장이었다.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칵테일(1988)'이 자신의 이야기라고도 했다.
1960년대는 최초의 경구피임약 에노비드가 승인을 받으며 신체에 대한 여성들의 선택권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시기였다. 이런 분위기와 맞물려 티지아이의 여성 친화적 문화는 큰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이에 스틸먼은 맨해튼에 다른 레스토랑을 여는 한편 티지아이의 프랜차이즈화를 시작했다. 원래 바에 더 가까웠던 티지아이가 한국에 진출한 것과 같은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전격 변모하기 시작한 건 1972년이었다.
1971년 사업가 대니얼 R. 스코긴이 미국 중서부 도시 8곳의 티지아이 사업권을 따냈다. 이듬해 텍사스주 댈러스에 티지아이의 새로운 원형이 될 공간을 연다. 목재를 활용한 인테리어에 단차가 있는 티지아이 특유의 공간이 스코긴의 감독 아래 탄생했다. 그는 맨해튼에서 젊은 여성을 위한 공간이었던 티지아이를 교외의 가족을 위한 음식점으로 변모시킬 심산이었다.
스코긴의 시도는 성공을 거두었다. 새롭게 문을 연 댈러스의 티지아이는 이전 매출과 이익 최고 기록의 각각 두 배와 세 배를 기록하며 단숨에 브랜드의 정체성을 새로 확립했다. 이후 6, 7년 동안 댈러스를 거점으로 티지아이는 완전히 다른 식음료 공간으로 거듭났고, 이에 힘입어 스코긴은 티지아이 프라이데이 주식회사를 차려 15년간 경영했다. 상징적인 메뉴인 포테이토 스킨이나 얼음을 갈아낸 슬러시로 만든 음료도 모두 그의 업적이다.
그리고 곧 변화가 찾아왔다. 1975년 브랜드가 호텔업 사모펀드에 매각되면서 스틸먼은 1호점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한편 스코긴은 티지아이의 최고경영자로 미국 내 100호점을 넘긴 뒤 기업 공개와 세계 진출을 주도했다. 이후 영국을 시발점으로 세계 진출을 시작했고 2008년에는 미국에서만 601개 지점에 2,000억 달러의 규모로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덩치를 불리면서 반조리 음식을 쓰기 시작했고 수준이 떨어지며 꾸준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한국의 티지아이는 또 다른 결의 외식 공간으로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1992년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1호점을 내면서 진출했는데, 주 6일제가 한창이라 사실 '감사합니다. 금요일이군요!'조차 와닿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미국에서는 프랜차이즈화되어 교외로 진출하면서 저렴한 레스토랑이 되어버렸지만 티지아이의 국내 입지는 달랐다. 메뉴 단가가 2만 원대 수준으로 진입장벽이 높은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당시 한국에는 적절한 수준의 정제된 양식 외식 공간이 없었다. 1979년 롯데리아, 그리고 1980년대 중후반 버거킹, KFC, 피자헛과 맥도날드 등의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가 등장해 자리를 잡았고 돈가스를 파는 경양식집과 뷔페 정도가 양식의 전부였다. 패밀리 레스토랑도 일본계인 코코스가 유일했다. 이런 현실에서 본격 미국식인 티지아이는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LG그룹 가문과 인척지간인 이선용, 이지용 형제가 티지아이를 들여왔는데 여러 국면에서 새로운 문물이었다. 일단 규모부터 달랐으니 양재점은 1,650㎡(500여 평) 규모에 60명의 접객원, 130여 가지의 음식과 280여 가지의 음료를 갖췄다. 전채, 주요리, 디저트의 코스별 메뉴에 미국식과 멕시코식, 심지어 한식까지 골라 먹을 수 있었다. 업계 최초의 어린이 메뉴까지 갖춰 티지아이는 단숨에 가족 외식의 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무릎을 꿇고 식탁에 앉은 고객과 눈높이를 맞추며 주문을 받는 퍼피도그(Puppy Dog) 서비스가 약간의 논란을 빚었지만, 티지아이는 당시 한국에 전례가 없었던 친절한 접객 문화를 도입했다. 창업자 스틸먼의 생일 축하 문화도 들여와 직원들이 노래를 부르고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 주는 등의 이벤트를 벌였다. 덕분에 티지아이는 젊은이들에게 '생일에 가는 레스토랑'으로 각인되었다.
그렇게 티지아이는 금세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확장하며 대략 15년의 전성기를 누린다. 1996년 업계 최초로 공식 홈페이지를 개설하는 등 음식 외의 문화적 차원에서도 나름의 선구자적 노릇을 했지만 시장이 과열되면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티지아이의 성공 사례에 다른 패밀리 레스토랑 브랜드들이 국내에 진출하면서 출혈 경쟁으로 채산성이 악화돼 브랜드 이미지도 나빠졌다.
2000년대 중후반 파인다이닝 문화가 싹트기 시작하면서 음식과 분위기가 시대에 뒤처지게 된 것이다. 그런 가운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패밀리 레스토랑 업계 전체가 삽시간에 거의 정리된다. 아웃백 스테이크는 음식의 질을 높이면서 재기했지만 패밀리 레스토랑의 시대가 다시 찾아올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오늘날 티지아이는 롯데리아 산하 브랜드로서 서울과 대전, 대구 등에 15곳의 매장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