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수도 워싱턴 북동쪽의 로건 서클 역사지구. 원형 교차로를 에워싸고 1875년부터 1900년대 초 사이에 지어진 빅토리아 양식 건물 135채가 밀집했다. 오래된 전통 가옥이 즐비해 '워싱턴의 북촌'으로 통하는 이곳의 핵심 랜드마크는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하 주미 공사관)'. 고풍스러운 적갈색 건물들 사이에 태극기를 달고 당당하게 서 있는 주미 공사관은 올해 9월 미국 연방정부의 국가사적지(NRHP·National Register of Historic Places)로 등재된 후 지역 명소가 됐다. 이달 초 현지에서 만난 강임산(56)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미국사무소장은 "한국인뿐 아니라 미국인들의 방문이 크게 늘었다"며 "이전에는 구한말 외교를 기억하려는 한국인과 재미동포들이 알음알음 찾아왔다면 이제는 한국과 미국이 역사적 가치를 공유하는 소중한 장소로 거듭났다"고 말했다.
주미 공사관은 대한제국 재외공관 중 유일하게 원형이 남은 단독 건물이다. 조선과 미국의 외교협정 체결에 따라 1887년 초대 공사로 파견된 박정양이 고종에게 받은 2만5,000달러로 건물을 매입해 1889년부터 16년간 공사관으로 사용했다. 1910년 일제로부터 단돈 5달러를 받고 굴욕적으로 강제 매각당한 후 미국인 거주지로 사용되다 2012년에서야 국가유산청이 350만 달러(약 39억 원)를 들여 구입·복원해 2018년 5월 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주미 공사관을 관리하는 강 소장은 주미 공사관 건물의 매입, 복원, 리모델링 등 다양한 실무를 총괄했고, 지난해 3월엔 소장으로 부임해 미국 국가 사적지 지정을 위해 뛰었다.
미국 국가 사적지는 미국 국가사적보존법에 따라 역사적 중요성이 있는 건물을 지정하는 제도로, 한국의 국가유산제도와 유사하다. 주미 공사관은 1877년 건축 당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19세기 워싱턴에 들어선 30개 외교 공관 중 유일하게 보존된 건물이다. 이번 미국 사적지 지정은 역사·문화유산전문가 집단인 '워싱턴DC 보존 기구(DC Preservation league)' 추천으로 이뤄졌는데, 19세기 말 공사관의 모습을 담은 사진 몇 장을 단서 삼아 실내 벽지, 카펫, 가구 등을 세심하게 재현한 5년간의 복원 작업이 심사 과정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사적지 지정 이후에는 한국어를 제2·3외국어로 채택한 미국 중·고등학교와 한국 문화에 관심이 있는 커뮤니티의 단체 관람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 강 소장은 "미국 내 한국 건물로는 최초로 국립 사적지로 지정되면서 미국 10대 학생들과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공사관에 들러 한국의 근현대사를 배우는 계기가 마련됐다"며 "셔틀버스가 시범운행을 시작한 지 10분 만에 매진될 만큼 수요가 많다"고 했다.
강 소장은 공사관의 활용 방안을 고민하는 것이 다음 과제라고 했다. 1, 2층은 옛 공사관의 내부를 복원한 재현 공간으로, 3층은 한국과 미국의 역사를 설명하는 전시 공간으로 쓰이는데, 2018년 5월 개관 이래 전시 내용이 그대로다. 그는 "과거를 박제한 공간이 아니라 오늘날 미국 속 한국, 한국 속 미국을 경험할 수 있는 중심 공간으로 활용해 나가야 한다"며 "개관 이후에 추가 발굴된 사료를 바탕으로 3층 전시 공간을 업데이트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발굴 사료가 올해 발견된 4대 공사 이채연의 일기다. 영어 회화가 가능해 초대 공사인 박정양과 함께 미국에 파견됐다 귀국한 이채연(1861∼1900)은 몇 해 뒤 4대 공사로 부임해 일한 기록을 남겼다. 강 소장은 "이채연의 일기를 번역 중"이라며 "당시 파견된 조선인 중 유일한 영어 구사자로서 선진 문물을 경험하고 조선에 돌아가 한성전기 초대 사장,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을 지낸 전설적인 인물의 기록인 만큼 당시 시대상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최근에는 미국 외교 명문가의 가족묘에 자리 잡은 이채연의 아들 이화손의 묘가 워싱턴DC 보존기구가 작성한 'DC의 중요한 역사적 장소' 목록에 올랐다. 이 목록은 미국 사적지 예비 후보격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