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랭킹 1위의 승부 호흡은 역시 남달랐다. 인공지능(AI) 승률 그래프에서 90% 이상 상대에게 넘어갔던 승부를 끈질긴 추격전 끝에 막판 극적인 뒤집기로 가져오면서다. 글로벌 바둑계 현재권력인 한국의 신진서(24) 9단이 15일 경기 고양시 삼성화재 글로벌캠퍼스에서 벌어진 ‘2024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우승상금 3억 원) 16강전에서 라이벌인 중국의 커제(27) 9단에게 승리한 기적 같은 역전 드라마 얘기다.
이날 대국에 앞서 전문가들은 신 9단의 무난한 승리를 점쳤다. 상대전적에서 13승11패로 앞선 신 9단이 최근 커제 9단에게만 8연승을 이어왔던 터였다. 하지만 이날 대국은 당초 예상과 달리, 초반부터 신 9단에게 비세로 흘렀다. 우상귀와 우상변으로 이어진 접전 도중 극단적인 실리(집) 위주로 나선 커제 9단에게 꽃놀이패를 내주고 주도권까지 빼앗기면서다. 벼랑 끝까지 내몰린 상황이었지만 승부를 포기하지 않았던 신 9단에겐 기회도 찾아왔다. 상변 접전에서 승리를 직감이라도 한 듯한 커제 9단의 느슨했던 착점 탓에 일방적으로 기울었던 판세가 원점으로 회귀한 것. 이후, 마지막 하변 끝내기 수순에서도 커제 9단의 미세한 실수가 나오면서 승리는 반집(0.5집)을 남긴 신 9단에게 돌아갔다.
이번 대국은 한·중 바둑계 간판스타의 맞대결이란 측면에서 상당한 관심을 모았다. 신 9단은 지금까지 반상(盤上) 권력의 잣대인 세계 메이저 대회 우승컵만 7개를 적립했다. 신 9단은 내년 2월말엔 ‘제1회 난양배 월드바둑마스터스’(우승상금 25만 싱가포르달러, 약 2억5,500만 원) 우승을 놓고 중국 차세대 주자인 왕싱하오(20) 9단과 맞대결도 앞두고 있다.
커제 9단의 이력 역시 화려하다. 현재까지 8개의 세계 메이저 기전 타이틀을 수확한 커제 9단은 4년 전 열렸던 ‘2020 삼성화재배’ 우승 이후 하향세에 접어들었단 평가도 나왔지만 최근 진행된 ‘제29회 LG배 기왕전’에서 결승까지 진출, 자신의 존재감을 재확인한 상태다.
바둑TV 해설위원인 송태곤(38) 9단은 “세계 대회에서 우승하기까진 모든 대국을 완승할 순 없다”며 “신 9단이 이번 커제 9단과의 대국 승리로 큰 위기를 잘 넘겼다고 본다”고 전했다.
한편, 지난 11일부터 시작된 이번 ‘2024 삼성화재배’엔 한국(12명)과 중국(16명), 일본(2명) 등을 포함해 대만(1명) 및 태국(1명)에서도 참가했다. 이 중 8강행 티켓을 거머쥔 선수는 한국의 신 9단을 제외하고 7명의 중국 기사들로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