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생 이민지(17· 이하 가명)는 어른 말을 좀처럼 거스르지 않는다. 그런 아이가 교실에서 선생님의 지시에 불응하며 기싸움을 벌였다.
"모자 안 벗어?"
지난 6월, 기말고사 시험 종료까지 3분쯤 남았을 때 감독 교사는 모자를 쓴 채 문제를 풀던 민지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아이는 주저하다 대꾸했다.
"시험이… 끝나면 벗겠습니다."
같은 반 학생 20여 명의 시선이 동시에 민지 얼굴로 향했다. 짐짓 태연한 척했지만 몸은 오들오들 떨렸다. 맨얼굴을 드러낸다는 건 이 아이에게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선생님 입장에서도 대충 넘길 수 없는 사안이었다. 교사로서 권위가 바닥에 떨어지는 장면을 모든 아이들이 지켜본다면 향후 생활 지도에 애를 먹을 수 있다.
결국 민지는 '교권 침해 학생'으로 관할 교육지원청의 교권보호위원회에 회부됐다. 결과는 교내봉사 3일. 엄마 이소정(46)은 딸의 행동에 무척 화가 났다. 고교 2학년 내신이 대학 입시에 얼마나 중요한데 이런 사고를 치다니. 엄마는 학교 측에 민지의 행동을 해명해 보려고 했지만 처분은 바뀌지 않았다. 딸은 까맣게 탄 엄마 속도 모르고 함께 길을 걸으며 "누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소정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도 아무 말도 못했다. 아이를 마냥 탓할 수 없는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4개월 전 '그날' 이후 열일곱 살 민지의 삶은 크게 달라졌다.
지난 2월 5일, 늦겨울 부슬비가 내리던 월요일 저녁이었다. 인스타그램 알림이 잠겨 있던 민지의 스마트폰을 깨우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 메시지(DM)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발신자는 처음 보는 아이디를 썼다.
"이민지?"
왠지 모를 불안감이 민지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꺼림칙한 기분을 애써 누르며 짧게 답했다.
"응, 난데. 왜?"
알림음과 함께 대화창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자신이 가슴을 훤히 드러낸 채 알몸으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민지 얼굴이었다. 지난해 12월 친구들과 서울의 놀이공원에 놀러갔을 때 기념품 가게에서 산 머리띠를 하고 손가락으로 'V'를 그리며 찍었던 모습. 하지만 몸은 자신이 아니었다. 비현실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너무 자연스럽게 합성돼 마치 실제 사진처럼 보이는 딥페이크(인공지능으로 만든 가짜 이미지)였다. 사진을 보내준 낯선 이는 대화를 이어갔다.
"김기태 알지? 걔가 줬어."
김기태는 민지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수업 시간에 수시로 장난치며 분위기를 흐리던 아이로 기억한다. 지금은 학교도 다르다. '졸업 후 한 번도 본 적 없는 애가 왜 나한테 이런 짓을 했지?' 민지가 혼란스러워하며 즉답하지 않자, DM방의 상대는 의기민지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김기태가 엑스(X·옛 트위터)에 '지인능욕방(아는 사람의 나체 합성 사진 등을 올리며 모욕하는 공간)을 만들어 민지의 딥페이크 사진을 게시했는데 자신이 접근해 이름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 등을 공유받았다는 것이다. 민지에게 피해 사실을 알리고, 김기태는 벌을 받도록 하는 게 목적이라고 했다.
민지는 곧 김기태에게 DM을 보내 조작 사진을 만들어 올렸는지 따져 물었다. 한참 뜸을 들이더니 건조한 두 문장의 답장을 보내왔다. "정말 미안해. 지금은 할 말이 없어."
민지와 부모는 경찰서에 달려가 피해 사실을 신고했다. 사건을 접수한 경찰관도 "가해자가 촉법소년(10세 이상 14세 미만)이 아니기에 이건 명백한 범죄"라며 위로했다. 민지는 가슴이 쿵쾅거려 한숨도 못 잤지만, 그 정신에도 DM을 통해 도움을 준 낯선 이에게 고마움은 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만 거치면 모두가 아는 동네. 안 좋은 일은 더 빨리 소문이 났다. 가해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피해자는 모두가 알았다. 경찰서를 찾은 다음 날부터 민지의 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려댔다. 주변 엄마들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민지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연락해왔다. 민지 가족이 사는 경기 오산은 신도시였던 터라 비슷한 때 이주해온 아이들이 대부분 유치원부터 함께 다녔다. 그만큼 관계가 촘촘했다. 소정이 가장 놀랐던 건 다른 지역에 사는 동창이 안부를 물어왔을 때였다.
"그 집 아들이 '엄마, 민지 누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나봐'라고 했대요. 가까이 살지도 않았고, 교류가 많지도 않은 친구였는데… 알고 보니 그 아들도 인스타그램에서 봤던 거예요. 이 정도면 사진이 전국에 퍼졌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죠."
더 기막힌 일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민지의 단짝 송지연(17)은 김기태와 같은 학교 한 반이었다. 사정을 뻔히 아는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생활하는 가해자의 모습에 부아가 치밀었다. 그러다 사달이 났다. 친하게 지내던 남자아이가 메신저로 김기태에 대해 묻자 대답하는 과정에서 심한 욕을 했다. 이를 전해 들은 김기태는 지연이 자신을 따돌렸다며 지난 5월 학교에 신고했다.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는 지연에게 학교 내 봉사 4시간을 명령했다. 딥페이크 가해자가 학폭 피해자로 뒤바뀐 순간이었다.
김기태는 1학기가 끝날 무렵 학교에 자퇴서를 냈다. 검찰에서 그 아이를 수사 중이었지만 학교는 이를 받아줬다. 정확한 상황을 모르는 아이들은 학폭 탓에 학교를 떠났다고 믿었다. 소정은 가해자의 자퇴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듣고 허탈감에 빠졌다. 김기태가 민지와 다른 학교에 다녔던 데다 경황이 없었던 탓에 딥페이크 범행을 아직 학폭으로 신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기태의 고교 생활기록부에 '죄의 기록'을 남길 방법은 영원히 사라졌다. 가해자가 학교를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민지가 소정에게 물었다.
"엄마, 걔는 이제 처벌할 방법이 없는 거야?"
민지 부모의 마음은 더 급해졌다. 가해자가 죄의 무게에 맞게 처벌받는 걸 확인시켜 줘야 딸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달래질 것 같았다. 수사기관에 기대를 걸었다. 경찰은 김기태를 조사한 뒤 6월쯤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고 했다. 하지만 10월이 될 때까지 어떻게 처리됐는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민지 아빠가 답답한 마음에 경찰에 물었더니 당황스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그 아이는 소년보호 사건으로 송치됐어요. 그런데 결과는 피해자에게도 알려드릴 수 없어요. 아시잖아요. 이거 소년부 재판이라."
포기할 수 없었던 부모는 백방으로 수소문하다가 우연히 김기태의 처분 결과를 확인했다. '수강명령'이었다. 수강명령 기관에서 30시간 성범죄 예방 교육만 들으면 공문서에 어떤 기록도 남지 않는다.
민지가 받은 충격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내 김기태의 범행을 알려준 '정의의 사도'가 이후 인스타그램 계정을 바꿔가며 딥페이크 사진을 퍼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민지의 친구들도 팔로(친구맺기)해 사진을 지속적으로 보냈다. 민지는 관할 경찰서에 신고하고 기다렸지만 "범인을 잡지 못해 관리 미제 사건으로 분류했다"는 답을 받았다. 경찰은 인스타그램 운영사에 계정 소유주의 신원을 확인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휴대폰 번호, 이름, 이메일 등은 받지 못하고 IP(인터넷 접속 주소)만 받았다고 했다. 그나마도 휴대폰을 사용한 유동 IP라서 용의자를 특정할 수 없었다는 설명이었다.
민지는 춤추는 걸 좋아하는 밝은 아이였다.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까르르하는 건 영락없는 10대였다. 하지만 사건 이후 댄서라는 꿈을 포기했다. 무대에 서서 타인의 시선을 견뎌낼 자신이 더는 없었다. 민지가 보기에 피해자인 자신은 지극히 운이 없었고, 가해자인 김기태는 기막히게 운이 좋았다. 누구에게도 사건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법이 없었지만, 엄마에게 전화해 20분 넘게 엉엉 우는 것으로 다친 마음을 드러냈다. 명랑했던 딸은 열일곱의 봄과 여름, 가을을 통째로 잃어버렸다.
반면 김기태는 자신의 꿈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듯 보였다. 학원에 다니며 대학에 들어갈 준비를 충실히 했다. "검정고시를 치른 뒤 유도 전공으로 체육 명문대에 진학하겠다"는 포부를 주변에 떠벌렸다. 또래들에게는 스스로를 열심히 변호했다. 자신이 민지의 합성 사진을 누군가에게 보낸 건 요구를 받아서 한 행동일 뿐 퍼뜨릴 의도는 없었다는 것이다. "나도 피해자"라는 말도 덧붙였다.
엄마는 어떻게든 딸을 위해 가해자의 사과를 받아내고 싶었다. 교육청도, 법원도 가해자를 단죄하지 못하자 민사소송을 시작했다. 인터넷을 뒤져 학교폭력 사건 처리로 유명하다는 법무법인을 찾아 변호사 선임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민지의 변호사가 과거 김기태의 딥페이크 사건 처리를 도왔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미성년 범죄자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피해자에게조차 알려줄 수 없다는 김기태의 처분 결과는 뜻밖에도 법무법인 직원이 변호사에게 보내려던 김기태 관련 문서를 소정에게 잘못 보내면서 알게 됐다. 변호사 측은 문제가 없다는 태도였다. '이의제기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착수금 550만 원을 환불 받아가라'고 했다. 법무법인 측은 입장을 묻는 기자에게 "가해자와는 선임 계약이 종료된 데다 우리 법인에서 맡은 사건이 너무 많아 일일이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답했다.
불과 9개월 사이 세상의 온갖 부조리를 맞닥뜨리자 소정과 민지는 사회를 불신하게 됐다.
세상을 믿지 못하게 된 건 소정 모녀만이 아니었다. 한 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심란함을 감추지 못했다. 누구도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했다. 그래 봤자 SNS에 올렸던 사진을 지우는 게 전부였다. 여자 아이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넣은 조작 사진이 이미 만들어져 온라인 공간을 떠돌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퍼졌다.
가해자가 떠난 학교는 남은 아이들의 마음을 모르는지 조용했다. 2학기 개학을 얼마 앞둔 8월, 온라인에는 '딥페이크 피해 학교 명단'이 떠돌았지만, 피해 사실 전수 조사 등 별다른 대처는 없었다. 두 차례 진행된 학교폭력 피해 전수조사도 딥페이크에 대한 항목은 빠진 채 형식적으로 이뤄졌다. 경기교육청도 학교폭력 및 딥페이크 신고 안내 등의 내용을 담은 가정통신문을 12차례 보냈을 뿐, 별도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학교 측은 "피해 학생(민지)이 학폭위 신청을 하지 않아서 기태에 대한 학폭위가 열리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절차상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밝혀야만, 가해 학생에 대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사건 이후 우울증을 앓아온 민지는 최근 부모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학교 밖으로 나와 혼자 공부해보고 싶다는 취지였다. 엄마는 딸의 심정을 이해했지만, 쏟아질 듯한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고교 학창 시절은 다시 돌아갈 수 없어. 친구들과 수학여행도 가고 소풍도 함께 가서 예전처럼 깔깔거리며 추억을 쌓았으면 좋겠어. 평생 그 추억으로 사는 거야. 학교는 원래 그런 공간이니까."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가능성 △피·가해자가 모두 미성년자라는 점 등을 감안해 사건 관련 인물들의 이름을 모두 가명 처리했습니다.
※한국일보는 오는 29일부터 딥페이크 사건 이후 과정을 다룬 '무너진 교실 : 딥페이크 그후'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범죄를 당한 국내외 10대 피해자들의 고통 △가해자를 낳는 왜곡된 환경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와 부모의 이야기 등을 심도있게 취재해 전달할 예정입니다.
※<제보받습니다> 한국일보는 딥페이크 범죄 피해를 당한 아동∙청소년과 그 가족, 주변 분들의 제보를 받습니다. 딥페이크 피해와 그 이후 수사, 재판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 학교 안팎에서 겪은 부조리, 2차 가해 등이 있으시다면 제보(dynamic@hankookilbo.com) 부탁드립니다. 제보한 내용은 철저히 익명과 비밀에 부쳐집니다. 끝까지 취재해 보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