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돌아왔다. 백악관을 탈환하고, 상·하원 다수당도 차지했다. 이른바 '붉은 파도(red wave)'다. 4년 전 바이든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채 플로리다로 가버렸던 트럼프가 더 강해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트럼프의 귀환이다. 수많은 스캔들과 막말, 거기에다 4건의 형사소송까지 걸려있고,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지탄받던 트럼프를 다시 백악관으로 보낸 미국인은 어떤 사람들일까? 왜 그랬을까?
트럼프가 바꿀 세상을 진단하려면, 우선 이 질문에 대한 답부터 찾는 것이 중요하다.
애팔래치아산맥 서쪽, 오대호 부근의 넓은 지역은 원래 철강,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였다. 주로 백인들이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타고, 아이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면서 미국 중산층으로 품위 있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세계화와 함께 변화가 찾아왔다. 동아시아에서 값싸고 질 좋은 공산품이 밀려들면서, 이들의 일자리가 사라져갔다. 저임금 서비스 일자리는 더 낮은 보수에도 기꺼이 일하는 이민자들이 차지했다. 평온하던 공동체는 황폐해지고, 그 자리에 알코올과 마약이 들어왔다. 부통령 당선자 JD 밴스가 2016년 '힐빌리의 노래(Hillbilly Elegy)'라는 고발성 회고록으로 러스트벨트의 몰락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러스트벨트와 중서부 농촌의 "저학력, 백인, 남성, 노동자"들이 2016년 트럼프를 백악관으로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불만은 일자리뿐만이 아니었다. '소수인종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소수인종 우대정책이 처음 나왔을 때는, 이들은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러나 삶이 어려워지자, 그게 아니었다. "힘들기는 나도 마찬가지인데, 왜 저들은 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우대받고, 나는 고통을 견뎌야 하는가?" 더 답답한 건, 이런 불만을 토로할 데도 하소연을 들어주는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들 앞에 트럼프가 나섰다. "지금 힘든 것은 여러분 탓이 아닙니다. 기득권 엘리트들의 잘못입니다." 그러면서, 세 가지 문제점과 세 가지 해법을 내놓았다.
좌절하던 미국인들은 '사이다 발언'에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통쾌함을 느꼈다. 트럼프는 "우리를 위해 기득권과 싸우는 전사"였다. "예수는 나의 구세주요, 트럼프는 나의 대통령"이라는 구호가 트럼프 집회장에 넘쳐났다.
트럼프가 백악관에 들어간 이듬해 2018년 여름, 헨리 키신저 박사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트럼프를 이렇게 묘사했다.
키신저가 말한 "역사상 한 시대"는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해온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말한다. 국제정치의 힘과 질서를 한평생 연구해온 키신저는 트럼프에게서 국제질서의 전환을 보았다. 트럼프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3개 축을 흔들고, 그 자리에 미국 제일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우고 있었다. 첫째, 세계경찰 역할을 거부하고, 공공재로 제공해온 국제 안보에 값을 매겼다. 둘째, 고율 관세로 무역전쟁을 시작하고, 자유무역의 상징인 세계무역기구(WTO)를 마비시켰다. 마지막으로,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거부하고 삼권분립의 견제와 균형을 무너뜨리려 했다.
한마디로 트럼프는 미국이 지난 80년 동안 세계와 관계를 맺어온 방식과 조건을 전환하려 했다.
트럼프는 2017년 이 작업을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8년이 지난 지금, 더 많은 미국민의 지지를 받으면서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여건이 훨씬 좋아졌다. 1기 때는 준비되지 않은 채 백악관에 들어갔지만, 이번에는 정책도 인사도 철저하게 준비했다. 지난번에는 "안 됩니다"라고 가르치려 드는 소위 "어른들"을 곁에 두어야 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리고 지난번과 달리, 지금은 공화당을 완전히 장악했다. 더구나 공화당이 상·하원 다수당까지 차지했으니, 고위직 인준도 예산지원도 문제가 없다.
대통령 재임 경험까지 갖춘 트럼프는 이제 지지자들에게 약속한 다음의 3가지 과제를 빠른 속도로 마무리하려 들 것이다. 첫째, 불법 이민. 멕시코 국경의 장벽 건설을 완료하고, 사상 최대의 불법 이민 추방 작전을 시작할 것이다. 둘째, 제조업 재건. 2017년에 21%로 낮춘 법인세를 다시 15%로 낮추어 국내 생산을 유도하고, 해외에서 들여오는 물건에는 최대 60%, 필요하면 100~200%의 관세를 매기겠다고 선언했다. "미국 시장에 내다 팔려면 미국에서 생산하라"는 메시지다. 1기 행정부 4년 동안 중국과 무역전쟁을 벌였던 반세계화, 반자유무역 선봉장 로버트 라이트하이저(Robert Lighthizer)를 무역대표부(USTR)에 다시 기용했다. 세계 경찰 노릇을 하지 않겠다는 세 번째 공약도 빈말로 끝내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가 "하루 만에 끝내겠다"고 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대외정책 최우선 순위에 오를 것이다. 다만, 평화가 말처럼 쉽게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오랜 전쟁으로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나오면서 전쟁의 국내적 맥락이 견고해졌으며,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온 유럽 국가들과도 말을 맞추어야 한다. 지난 6월 트럼프 대선 캠프 외곽의 미국제일주의연구소(AFPI)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일단 보류하고, 현 전선에서 휴전하도록 압박하는 방안"을 제시했으나, 트럼프 캠프는 공식 입장이 아니라고 밝혔다. 전쟁을 서둘러 끝내고 싶은데, 방법이 마땅하지 않다.
유럽의 나토 회원국들은, 핵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스스로 러시아를 상대할 수 있을 만큼 역량을 강화하라는 압박을 많이 받을 것이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관련, 트럼프는 지난 7월 네타냐후를 만나, "할 만큼 하되, 빨리 끝내라"고 했다. 전쟁의 향방은 이스라엘 또는 네타냐후가 얼마나 안전하다고 느끼느냐에 달린 듯하다.
트럼프 대외정책의 초점은 단연 중국과의 전략 경쟁이다. 중국에 추월당할 수는 없다. 다만, 이것은 군사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경제력과 과학기술력이 관건이다. 이 분야에서 경쟁은 더 가열될 것이다. 대만해협의 전쟁 가능성은 근거가 희박하다.
해외개입 축소와 관련, 트럼프는 우리에게 세 개의 화두를 던졌다. 방위비 분담, 주한미군, 그리고 북한 문제다. 한국에서는 방위비 분담이 가장 큰 현안으로 인식되지만, 그렇지 않다. 미국 대통령에게 돈 몇십억 달러가 대수겠는가. "세계 경찰 노릇을 그만두겠다"는 트럼프, 그가 지지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50억 달러 받아냈어!"가 아니다. "전쟁을 끝내고, 우리 아이들을 집에 데리고 왔어!"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일 수 있다. 주한미군은 북한 문제와 불가분으로 엮여 있다.
미국의 정치지형은 지금 80년 만에 보는 큰 변화를 거치고 있다. 트럼프 4년 동안 변화의 폭과 깊이는 더해질 것이다. 대선 패배로 구심점을 잃은 민주당이 4년 후에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앞세워 미국민의 선택을 호소할 수 있을까? 어려울 것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만 보면서 살아온 한국은 지금의 변화가 익숙하지 않다.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나라가 적응에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피할 곳은 없다. 나아가 우리 자신이 해내지 못한 일을 트럼프가 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70년 한미동맹의 폭과 깊이가 이번에 제대로 한번 힘이 되어 주기를 기대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