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 프랑스대혁명 이후의 정치 사회적 혼란을 겪으며 유럽 지식사회는 19세기 실증주의라는 새로운 인식론과 과학철학에 눈을 떴다. 세계 질서를 지탱하던 신학적-초월적 형이상학을 의심하며 오직 감각 경험과 검증을 거친 것만을 지식으로 인정하자는 철학과 방법론. 인간도 사회도 자연의 일부인 만큼, 실증적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제대로만 탐구하면 사회 규칙과 질서도 규명할 수 있다고 여겼던 프랑스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는 ‘사회물리학’이란 용어를 만들어내며 현대 사회학의 문을 열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본성과 심리를 행동-패턴 관찰과 분석을 통해 객관적으로 탐구하자는 ‘행동주의(behaviorism)’의 장을 열었다.
1879년 독일 라이프치히대 심리학자 빌헬름 분트(Wilhelm M. Wundt, 1832~1920)는 학교 강당 한편에 인류 최초의 심리학 실험실을 개설했다. 불순물투성이인 인간 심리에 대한 실험들이 그렇게 시작됐다. 당연히 어설픈 실패와 설익은 일반화 등 오류가 잇따랐고, 미성숙한 인권-윤리 의식에서 비롯된 위험한 실험도 적지 않았다.
오늘날 수많은 심리학 교과서가 반면교사의 예로 드는 비윤리적 실험의 첫 사례로 꼽는 1910년대 ‘어린 앨버트 실험’이 행동주의 심리학의 창시자로 꼽히는 미국 존스홉킨스대 존 B. 왓슨에 의해 이뤄졌다는 건 자못 상징적이다. 그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인간도 고통 자극과 함께 개를 지속적으로 보게 되면 자극이 사라진 뒤에도 개를 두려워하는지 알고자 생후 9개월 된 아이(Albert, 가명)에게 반복적인 공포 자극을 가했다. 개를 두려워하지 않던 아이는 개만 보면 겁에 질리곤 했다. 실험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아이는 만 6세에 뇌수종으로 숨졌다.
인간의 허술한 자율성과 개인 윤리의 취약성을 보여준 대표적 사회심리학 실험인 하버드대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복종 실험’과 스탠퍼드대 필립 짐바르도의 ‘감옥 실험’도 대표적인 비윤리적 실험 사례로 꼽힌다. 밀그램은 1961년 체벌의 학습효과를 연구한다고 속여 피실험자를 모집한 뒤 학생으로 가장한 연기자들이 오답을 댈 때마다 전기충격을 가하도록 지시했다. 피실험자 65%는 학생(연기자)의 처절한 비명을 들으면서도 지시에 따라 계속 전압을 올렸다. 권위(권력)의 부당한 지시에 쉽사리 복종하는 개인의 한계를 드러낸 저 실험은 2차대전의 홀로코스트를 겪은 인류에게 잔인한 자성의 계기를 제공했다. 하지만 그는 피실험자에게 실험 목적을 속인 데다 가학적 행동을 하게 함으로써 심리적 고통과 죄의식을 안긴 점 등이 문제가 돼 63년 학교에서 쫓겨났다.
짐바르도의 ‘감옥 실험’은 개인의 권위(권력)가 아닌 조직-집단의 논리가 긴 시간을 두고 개인 윤리-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본 실험이었다. 그는 피실험자를 간수와 죄수 집단으로 분류해 모의 감옥에서 2주 동안 지내게 함으로써 간수 역을 맡은 이들의 행동 패턴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폈다. 실험 양상은 그의 짐작보다 훨씬 드라마틱하게 가학적으로 치달았고, 사태가 험해지자 그는 6일 만에 실험을 중단했다. 그는 “쉽게 감지하긴 힘들지만 상황(환경)의 힘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게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짐바르도의 연구도 그가 관찰자가 아닌 감독관으로 실험에 참여함으로써 중립성에 흠집을 냈고 피실험자들의 인격적 존엄을 훼손했다는 등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두 심리학자의 실험은 반인륜적 조직-집단 범죄 가담자들에게 그럴싸한 변명의 논리를 제공했고, 또 그 때문에 실험의 비윤리성이 더욱 부각되곤 했다. 하지만, 인권의식의 시대적 한계와 무관하지 않은 여러 허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둘의 실험은 20세기 이래 인종청소를 비롯한 숱한 전쟁 범죄와 국가-집단 폭력, 즉 가해자의 탈개인화(익명성)와 피해자의 비인간화(차별화)가 양산한 책임 없는 범죄들의 진실에 값진 통찰을 제공했다. 앞서간 밀그램에 이어, 필립 조지 짐바르도가 최근 별세했다. 향년 91세.
밀그램의 실험이 ‘악의 평범성’이란 한나 아렌트의 통찰을 낳은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에 착안한 것이었다면, 짐바르도의 실험은 자신이 체험한 차별과 배제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동기에서 비롯됐다.
그는 이탈리아 시칠리아계 이민자의 4남매 중 장남으로 1933년 뉴욕 브롱크스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이발 노동자 아버지는 실직 상태일 때가 잦았고, 가족은 집세를 내지 못해 한밤에 이삿짐을 싸기 일쑤였다고 한다. 짐바르도는 5세 무렵 폐렴과 백일해에 걸려 뉴욕 시립병원(Willard Parker Hospital) 어린이 병동에 6개월 가량 입원했다. 페니실린이 나오기 전이었다. 아이들은 “약물도 치료법도 사실상 치료도 없이” 어울려 노는 것조차 금지당한 채 ‘러시안 룰렛’ 같은 운명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영민했던 그는 거기서 독학으로 읽고 쓰는 법을 익혔고, 병동의 권력자였던 간호사들에게 잘 보이면 많은 것- 설탕과 버터, 따듯한 미소와 손길-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도 깨우쳤다. 2000년 ‘Psychology Today’ 인터뷰에서 그는 “삶의 형성기에 겪은 그 극단적 고립의 경험은 내가 사회심리학자가 되고,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연구에 몰두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배제와 차별은 그의 혈통과 피부색에도 늘 따라다녔다. 단지 외모가 유대인을 닮았다는 이유로 그는 또래들로부터 “더러운 유대인 새끼”란 욕을 들으며 집단 구타를 당한 적이 있었다.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던 고교 1학년 땐 ‘시칠리아 혈통의 뉴욕 출신(마피아 편견)’이란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다. 브루클린대에서 3개 전공(심리학, 사회학, 인류학)을 이수해 우등 졸업한 뒤 예일대 대학원(심리학)에 지원했을 때엔 어두운 피부색 때문에 교수들이 그를 흑인으로 오인해 입학을 불허하려 하기도 했다. 뉴욕대에서 강의하던 무렵 소형 트럭을 빌려 이사를 하던 그를 두고 한 이웃이 “이런, 푸에르토리코인들이 이제 여기까지 이사를 오네”라고 들으란 듯 말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소위 진보적이라는 대학들에도 교내식당엔 암묵적인 ‘흑인 테이블’이 있었다”고 말했다.
당연히 가난도 차별-배제의 이유였다. 허름한 차림의 그가 치과 치료를 받던 중 통증을 호소하자 의사가 수련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런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불평불만뿐이니까 말은 무시하고 눈빛을 봐야 해. 그래야 진짜 메시지를 알 수 있어.”
그는 “그런 믿음(편견)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지, 사람들은 어떻게 전혀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강한 신념을 지니게 되는지, 그런 성정과 태도도 바뀔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고 말했다. 대학원에서 그가 몰두한 연구 주제는 사회적 맥락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들의 태도와 행동이었다. 그는 59년 박사 학위를 받고 뉴욕대(60~67)와 콜럼비아대(67~68)에서 강의한 뒤 68년 프린스턴대 정년 보장 교수가 됐다.
그의 이름이 미국 주요 매체에 처음 등장한 것은 69년 2월 ‘자동차 반달리즘(vandalism) 실험’ 덕이었다. 그는 낡은 올즈모빌 승용차의 번호판을 떼고 트렁크를 살짝 열어둔 채 뉴욕의 한 중산층 거리에 방치한 뒤 64시간 동안 시민 반응을 몰래 관찰했다. 처음엔 무심히 지나치던 시민들은 얼마 뒤 쇠톱으로 부품을 절단하는 등 쓸모 있는 것들을 뜯어가기 시작했다. 차량 훼손-절도는 주로 환한 대낮에, 버젓한 차림의 중산층 시민들에 의해 저질러졌고, 심지어 유모차를 끌고 온 주부도 가세했다. 만 하루가 지날 무렵 차의 배터리와 안테나, 앞유리 와이퍼, 점퍼 케이블, 타이어 등이 사라졌고, 이후 10대들의 파괴의 놀이터로 바뀌었다고 한다. 짐바르도는 당시 상대적으로 공동체 문화가 유지되던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에서 같은 실험을 재연해 사흘 동안 차를 훼손한 이가 아무도 없었던 점을 대비하며, 대도시의 익명성과 공동체 문화의 부재 등이 반사회적 행동-반달리즘-의 주요 원인이라고 결론지었다.
감옥 실험도 그 연장선 위에 있었다. 그는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67년 영화 ‘Cool Hand Luke’에서 착안, 제복으로 상징되는 집단의 문화와 정체성이 개인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자 했다. 미 해군연구소의 지원을 받은 그는 일당 15달러에 2주 간 감옥 실험 참가자를 모집, 남자 대학생 지원자 75명 가운데 폭력 등 전과가 없고 심리적으로 안정된 24명을 선발해 동전 던지기로 간수-죄수 그룹을 나눴다. 지역 경찰의 도움을 받아 실제처럼 죄수들을 체포해 탈의-신체검사를 받게 한 뒤 죄수복으로 갈아입혀 대학 심리학과 건물 지하 공간을 개조한 감방에 수감했다. 간수들에게는 잘 다린 유니폼을 지급하고 선글라스를 쓰게 했다. 감독관 역을 맡은 짐바르도는 ‘간수’들에게 구체적인 지침 없이 “고문만 빼고 죄수 통제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일체의 통제 권한”을 부여했다.
간수들의 태도는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가학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부당한 처우에 반발해 단식을 감행한 죄수를 세 시간 동안 독방(규정은 최대 한 시간)에 가두는가 하면, 팔굽혀펴기 등 체벌과 수면 박탈 등 (준)고문을 일삼았고, 맨손으로 변기를 닦게 하거나 변기 대용 양동이를 못 비우게 했다. 반나체로 서로 껴안도록 강요한 경우도 있었다. 한 죄수는, 의도적인 연기였다고 나중에 고백했지만, 울부짖는 등 극도의 스트레스를 호소해 중도에 이탈하기도 했다. 실험은 훗날 짐바르도의 두 번째 아내가 된 당시 박사후과정 연구원 크리스티나 매슬랙(Christina Maslach) 등의 적극적인 만류로, 엿새 만에 중단됐다.
그의 실험은 엄청난 사회적 파장과 함께 에리히 프롬 등 학자들의 거센 비난을 샀다. 윤리적 비난뿐 아니라 실험 중립성과 객관성도 비판 받았다. 짐바르도는 “외부적 환경(상황)이 우리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은 대다수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할 수 있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개인의 사회적 역할과 외압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할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일종의 경고”라고 자신의 실험을 옹호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상당수 단편적인 자료들은 그를 마치 타락한 심리학자의 한 표본으로, 또 그의 실험은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규정하지만, 그의 문제의식은 개인 윤리가 비대한 집단윤리 혹은 군중심리에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값진 통찰로 지금도 폭넓은 동의를 얻고 있다.
짐바르도는 2004년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수감자 가혹행위로 재판을 받은 한 하사관(Sgt. Ivan Frederick)을 위한 전문가 증인으로 법정에 섰다. 그는 기소된 병사들을 ‘일부 썩은 사과(bad apple)’라고 질타한 부시 행정부를 비판하며 “사실 그들은 썩은 상자(bad barrel)에 담긴 좋은 사과였다”고 주장했고, 2016년 영국 인디펜던트 인터뷰에서는 “군대가 상황을 만들어놓고 책임은 회피하고 있다. 의심해야 할 대상은 병사들이 아니라(…) 지휘계통 전체”라고 말했다. 그리고 2007년 출간한 ‘루시퍼 효과(Lucifer Effect): 어떻게 좋은 사람이 악당으로 변하는가’라는 책에 이렇게 썼다. “당신은 사람이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일관된 성격을 지닌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혼자 일할 때와 무리의 일원일 때,(…) 친한 친구와 있을 때와 군중 속에 있을 때 당신은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개인이 자신의 성격과 인격, 안정적이고 일관된 도덕관을 뒤흔들 만한 총체적 상황에 직면하면 비이성적이고 어리석고 자기파괴적이고 반사회적이고 무의미한 행동을 하게 될 수 있다”며 ‘악으로 이끄는 7개의 미끄러운 경사로’, 즉 무심코 내딛는 작은 첫발- 타인의 비인간화- 자신의 탈개인화- 개인 책임의 희석- 권위에 대한 맹목적 순종과 집단 규범에의 무비판적 추종, 악에 대한 수동적 관용을 제시했다.
짐바르도는 2003년 은퇴할 때까지 스탠퍼드대에서 강의하며 “끊임없이 강제적 규칙을 집행하는 자기 안의 간수에게 짓눌린 죄수”와 같은 감금-억압의 한 형태로서의 병적인 수줍음(shyness) 증상, 방관자 효과의 메커니즘, 과거-현재-미래의 개인적 지향에 따른 성격과 행동 패턴의 경향성 등 다양한 연구와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누구나 상황에 따라 영웅도 될 수 있다고 여겼던 그는 2007년 ‘영웅적 상상 프로젝트(Heroic Imagination Project)’란 비영리단체를 설립해 운영하며 방송과 칼럼, 청소년 대상 강연 등에 힘썼다. “누구나 마틴 루터 킹이 될 수는 없지만, 누구나 아부그라이브의 야만을 고발하는 사람이 될 수는 있다.” 성인 수줍음 증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비영리 클리닉을 열었고, 가난한 이탈리아계 청소년들을 위한 장학재단도 설립해 운영했다.
정치인의 성격 평가에 대한 공동 연구로 2003년 이그노벨상을 타기도 했다. 이탈리아 시민 2,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연구에서 짐바르도 등은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 등에 대해 대중은 크게 5개 범주로 스타의 성격을 평가하는 반면 정치인에 대해서는 단 두 개의 기준, 즉 얼마나 열성적이냐와 얼마나 믿을 만하냐로만 평가한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심리학회장(2002)을 지냈고, 인간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한 연구 공로로 ‘하벨재단상(2006)’ 등 다수의 영예로운 상을 수상했다. 전처와 낳은 아들을 포함, 매슬랙과 52년 해로하며 2남2녀를 두었다.
그는 71년 실험의 윤리적 문제점은 당연히 인정했지만, 숨을 거둘 때까지 실험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신념은 굽히지 않았다. 그가 경계한 것은 인간에 대한 과도한 신뢰와 자기애적 편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