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여당이 주도하는 여야의정협의체가 민주당과 전공의 등 당사자들이 불참한 가운데 출범했다. 하지만 이 협의체가 역할을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한덕수 총리는 전공의들이 대화의 장으로 나서줄 것을 당부했으나 사직 전공의들을 업무방해라면서 협박하고 의대생들의 휴학도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이 정부의 '진심'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금년 초 의대 증원을 들고나온 정부는 필수의료 의사들을 '낙수 의사'로 모욕하고, 의사 자체를 '악마화'했다. 이런 망언을 한 정부 당국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이 정부의 '진심'이 아니겠는가.
한 총리는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필수의료 교수 충원 등을 내걸고 전공의들의 참여를 촉구했으나 전공의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이번 사태는 무모한 의대 증원으로 촉발됐음에도 한 총리는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으니 괴이한 일이다. 정부와 여당은 2025년 입시는 증원된 대로 치르는 수밖에 없다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협의 대상에서 제외시켰으니 애당초 협의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3,000명이던 의대 정원을 4,500명으로 늘린 데 실망한 의대 재학생들은 휴학을 선택했고 이로 인해 의대생 전원 유급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정부가 그간의 독단에 대해 사과하고 모든 것을 원상으로 되돌리지 않는 한 재학생들이 내년에 복학한다는 보장은 없다. 이들이 복학하고 신입생 4,500명이 들어오면 예과 1학년은 무려 7,500명이 되고 만다. 이들이 6년 동안 정상적인 교육을 받을 수 없음은 명백하다. 그러자 교육부 장관은 의대를 5년이나 5.5년제로 한다고 하고, 어느 대학총장은 의대를 4학기제로 운영한다는 등 주장을 편다.
의대 교육이 혼란에 빠질 것임을 아는 의대생들이 사병으로 입대하는 경우가 폭증했다. 군의관 복무기간이 사병 복무기간에 비해 길기 때문에 의대생들이 재학 중에 사병으로 입대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번 사태로 재학 중 입대가 관행이 되고 말았다. 사직한 남자 전공의들도 내년부터 순차적으로 일반 군의관으로 입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3~4년 후에 우리 군에서 전문의가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군의관 자체가 대폭 감소하는 재앙이 발생한다. 군의관 없는 군대는 전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안보 측면에서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공보의를 할 인적 자원도 사라져 버릴 것이기에 취약지역 의료도 심각한 상태에 처할 것이다.
정부는 서울의 상급 대형병원을 전문의 중심의 중증진료병원으로 전환시킨다면서 예산지원을 제시하고 있으나, 이는 종잇장 위에서나 가능하다. 전문의들이 서울로 모여들어 지방 의대와 병원들이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인데, 그런 현상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우리나라는 향후 최소 10년 동안 전문의 배출이 중단되기 때문에 전문의 중심 병원이란 구상은 허황된 것이다. 이로 인해 서울의 상급 대형병원과 지방의 대학병원들이 모두 재정위기에 봉착할 것이다.
'결자해지'라는 말이 있듯이 이번 사태는 문제를 야기한 정부가 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의대생들이 내년에 복학할지도 불분명하며 사직한 전공의들이 복직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의대생들이 복학하고 사직 전공의들의 절반이라도 복귀하기를 원한다면 정부는 2025년 증원을 백지화하고 그간의 독단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 이 모든 혼란을 해소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은 2025년도 의대 입시를 중단하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각 의대의 여건과 입대 휴학생 숫자 등을 감안해서 내년에 한해 신입생을 1,000명 미만으로 선발하는 방안을 고려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