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택 전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 탄핵에 결정타를 날린 전공의들이 의협 새 지도부 선거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2020년 의대 증원 정책을 둘러싼 갈등을 봉합한 의정합의 당시 의협 지도부가 독단적으로 합의를 강행했다며 전공의들이 반발했던 상황과 대조적이다. 의료계에서 대정부 실력행사를 감행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집단이 자신들이라는 점을 전공의들이 십분 활용하고 있다는 분석 한편으로, 이 같은 독주가 결국 선배 의사들의 반발을 사면서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13일 의료계에 따르면, 이날 진행된 의협 비상대책위원장 선거의 최대 변수는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비상대책위원장의 행보였다. 전날 박 위원장은 선거인단인 의협 대의원들에게 메시지를 보내 전공의 대표 72명은 비대위원장 후보 4명 가운데 박형욱(대한의학회 부회장)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혔고, 박 후보는 1차 투표에서 과반을 얻어 결선 없이 당선됐다. 후보 4명이 모두 전공의들과 연대할 뜻을 밝혔음에도, 특정 후보를 지목해 공개 지지 선언을 한 것이다. 그러자 의협 대의원회 의장단은 당일 박 위원장에게 경고문을 보내 "의료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도 특정 후보에게 유리할 수 있는 글을 올려 선거에 영향을 줬다"며 자제를 요청했다. 대전협의 막강한 '입김'을 의협 내부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전공의 집단행동의 위력은 우리나라 의료 체계의 과도한 전공의 의존성에서 비롯했다. 특히 상급종합병원이 전체 의사 인력의 40%가량을 임금이 낮은 전공의로 채워온 터라, 이들이 병원을 이탈하면 상급종합병원이 담당해온 중증·응급 진료가 차질을 빚으면서 전체 의료 체계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이런 취약한 구조는 2000년 의약분업, 2020년 의대 증원 및 공공의대 신설 추진 과정에서 전공의가 대정부 투쟁 선봉에 서면서 반복적으로 드러났다.
전공의 행태가 과거와 달라진 점은 의정 갈등 국면에서 의사계 맏형 기구 격인 의협과 소통하며 행동 전략을 짰던 것에서 벗어나, 의협을 포함한 다른 의사단체와 단절된 채 독자 노선을 걷고 있다는 점이다. 전공의 복귀가 의사 사회가 가진 가장 강력한 협상 카드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이번 사태에선 복귀 여부를 선배 의사가 아닌 전공의 스스로 결정하겠다고 나선 형국이다.
의료계는 2020년 의정합의의 충격으로 전공의가 의협에 등을 돌렸다고 보고 있다. 당시 최대집 의협 회장이 전공의와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은 채 정부와 합의했고, 이에 반발한 전공의 일부는 합의 이후에도 파업을 이어가기도 했다. 노환규 전 의협 회장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전공의들의 임 회장 탄핵 주문은 2020년 최 회장의 '배신'에 대한 뒤늦은 응징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대전협은 신뢰할 수 있는 지도부가 들어서야 의협과 협조하겠다는 입장이라, 의협 비대위원장은 물론 차기 회장 선거에 나설 인사들도 전공의 눈치를 봐야 할 판이다. 임 전 회장의 탄핵이 그와 반목해온 박 위원장의 자진 사퇴 요구로 급물살을 탄 점도 당분간 의협에 '학습효과'로 남을 공산이 크다. 전날 SNS 활동을 재개한 임 전 회장은 "박 위원장이 직접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서 내년 의대 증원 원점 재검토를 달성하라"고 역공에 나섰다.
다만 의사단체는 물론 전공의 사이에서도 박 위원장 1인 체제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박 위원장이 대전협 소통창구를 자신으로 단일한 채로 정부와의 대화를 일절 거부하면서 의대 정원 백지화나 증원 규모 축소의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사직 전공의는 "투쟁 방식에 대한 이견이나 박 위원장 개인에 대한 불만은 (이전부터) 있었다"며 "다만 외부의 적이 워낙 강경했기에 결속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가만히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한 의대생은 "박 위원장이 의협 회장은 물론 교수들도 비판해 의사 사회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있다"고 우려했다.
의협이나 의대교수 단체들이 언제까지 박 위원장과 보조를 맞출지도 미지수다. 한 의협 관계자는 "탄핵까지는 의협 대의원과 박 위원장의 이해관계가 맞았지만, 이후 의협 회장에 나올 후보들은 쟁쟁한 사람들이기에 마냥 휘둘리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의협 관계자는 "전공의가 핵심 투쟁 동력이니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지만 선배 의사들이 계속 끌려다니기만 하진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