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만화 한계 넘었다? 재수 없는 말!"…전혜진 작가가 순정만화·SF 컬래버한 이유

입력
2024.11.1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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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만화'X'SF소설' 시리즈 기획 전혜진 작가
과거 순정만화 붐 이끈 만화가들 향한 '오마주'
"억압받는 순정만화서 걸출한 SF 배출, 당연"

“평론가들이 칭찬이랍시고 하는 ‘순정만화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말이 정말 재수 없었어요. 억울하기도 했죠. 순정만화라는 장르로 싸잡고, 걸출한 작가들을 이런 칭찬 같지 않은 칭찬으로 퉁 치는 것이요.”

최근 경기 부천시 한국만화박물관에서 만난 소설가 전혜진(44)은 어려서부터 품어 온 이런 억울함에서부터 ‘순정만화XSF소설’ 시리즈가 탄생했다고 말했다. 이 시리즈는 1980~1990년대 ‘순정만화 붐’을 이끈 순정만화계 거목 3인(강경옥·신일숙·권교정)의 작품을 2024년 현재 공상과학(SF) 장르 최전선에 선 3명의 작가(박애진·듀나·전혜진)가 SF소설로 다시 써낸 연속 기획물이다.

“순정만화, 억압받은 여성 문학 계보 놓여야”

초등학교 시절부터 일본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와 한국 만화 잡지 ‘댕기’에 연재되던 만화의 팬픽(가상 소설)을 쓰는 '될성부른 떡잎'이 전 작가였다. 그랬던 그에게 ‘눈에 반짝이는 별을 박은 씩씩한 캔디 같은 여주인공이 고난을 헤치고 미남을 차지하는 이야기’라는 어른들의 순정만화에 관한 틀에 박힌 묘사는 “순정만화 하나도 안 읽어 본 사람이 하는 말”로만 들렸다. 작가가 되어 글을 쓰고 장르를 분석하며 그는 “이것이 차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순정만화가 억압받던 여성 문학의 계보 어딘가에 놓여야 하는 물건으로 여겨졌다”고 전했다.

‘여자애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이유로 만화 가운데서도 유독 순정만화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것이 전 작가의 말이다. “만화를 급이 떨어지는 매체라고 보는 와중에도 남성 원로 작가는 추앙 받지만 순정만화 작가는 지워졌다”는 문제의식에 더해 암 투병과 노환 등으로 세상을 떠나는 만화가들의 소식까지 겹쳤다. 전 작가는 “그들로부터 영향받은 작가들이 이만큼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다”며 “보고 싶은데 쓰거나 기획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이번에도 내가 저지를 수밖에’의 연장선”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SF 암흑기? 순정만화가 있었다"

왜 하필 순정만화와 SF였을까. 전 작가는 “순정만화에는 역사와 사극, SF 등 별별 장르가 다 있었다”며 “한국 SF의 암흑기라는 1990년대 안팎엔 순정만화가 그 맥을 이었지만 조명받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이번 시리즈의 원작인 강경옥의 ‘라비헴 폴리스’(1989)와 권교정의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1999)는 우주가 배경이고, 신일숙의 ‘1999년생’(1988)은 외계인에 맞서는 초능력자의 이야기다. 전 작가는 “SF는 미래 다른 세계에서 무언가를 바꾸고 다음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라면서 “그렇다면 억압받는 순정만화에서 걸출한 SF가 나온 건 논리적인 귀결”이라고 전했다.

원작을 보고 자란 작가들이 확장해 쓴 SF소설 역시 기후 문제와 여성, 소수자 등 첨단의 문제를 건드린다. 전 작가는 그러나 원작도 시대를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로 혁명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순정만화는 여성 작가가 여성 독자를 향해 어떤 급진적인 말이든 할 수 있던 장르”라면서 “신일숙과 유시진, 이진경 등 그대로 페미니즘 텍스트로 쓸 수 있는 작품도 1990년대에 많았다”고 말했다. 간성(間性)과 트랜스젠더 등 지금도 매체에서 잘 다루지 않는 소재도 순정만화에 등장했다는 것이 전 작가의 설명이다.

전 작가가 이 시리즈를 기획한다고 했을 때 “네 나이가 몇인데 동인지(同人誌)를 만드냐”는 시선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한 장르는 실시간으로 눈부신 성과를 거두고도 늘 말석에 놓여 모욕을 당했다”며 앞서 책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를 낸 전 작가에게 순정만화XSF소설 시리즈는 "써야만 할 것"이었다. 전 작가는 말했다. “’덕후’(마니아)가 성공한 ‘덕질’(팬 활동)을 한 게 아니겠어요. 마음 같아서는 여기 만화박물관 꼭대기에서 책을 들고 소리를 지르고 싶어요.”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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