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한국일보와 만난 임모(27)씨가 갑자기 말을 흐렸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쌍둥이 누나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올해 8월 3일, 여느 날과 같은 평범한 날이었다. 쌍둥이 누나 남자친구인 A(26)씨 연락을 받기 직전까진. 그는 처음엔 "누나가 위독하다"고 했다. 깜짝 놀란 임씨가 "무슨 일이냐" 물어보니 처음엔 "모르겠다"며 얼버무렸다. 그러고는 계속 말을 바꿨다. "흉기(칼)에 맞았다"고 하더니 나중엔 "스스로 찔렀다"며 횡설수설했다.
스스로 찔렀을 리가. 누나가 갑자기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미용을 배우던 누나는 평소에도 '미래'에 관한 생각을 자주 들려주던 사람이었다. 방법도 이해되지 않았다. '누나가 흉기를 자기 몸에?' 담당 의사도 "절대 혼자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라고 했다. 키 150㎝대에 체구도 작은 여성이 날 길이만 18㎝짜리 흉기를 심장 깊숙이 찌르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는 의견이었다.
임씨는 부검과 경찰 수사 결과를 묵묵히 기다렸다. 알고 보니 누나의 목숨을 앗아간 건 남자친구 A씨였다. 장소는 경기 하남시에 있는 A씨 집. 앞서 올해 6월 초 하남시의 한 아파트 인근에서 20대 여성이 남자친구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진 뒤 두 달여 만에 같은 지역에서 또 '교제 살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A씨와 임씨 누나는 당시 2주 정도 교제한 사이였다고 한다. 사건 약 열흘 전인 7월 25일엔 셋이서 함께 술자리를 한 적도 있었다. 누나는 그때 처음으로 A씨를 임씨에게 소개했다. 그때도 둘 사이 작은 말다툼이 있었고, 임씨는 먼저 자리를 피했다. "둘이 헤어지니 마니 이런 얘길 하길래 그냥 '헤어지겠네' 이 정도로만 생각했지,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임씨가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며 말했다.
처음에 임씨에게 거짓말을 했던 A씨는 현재 살인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상태다. 검찰 공소장 등에 따르면, A씨는 8월 2일 밤 12시쯤 자택에서 여자친구가 다른 이성과 30여 분 통화했다는 이유로 말다툼을 하다가 격분해 주방 싱크대 위 칼꽂이에 있던 흉기로 왼쪽 가슴 위를 찔렀다. 임씨 누나는 12분 뒤 심폐소생술(CPR)을 받으며 대학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도착했을 때 심장은 이미 멈춰있었다. 이 일이 있기 사흘 전 통화에선 임씨 누나가 "헤어지자"고 말하는 내용이 담겼다. 유족들이 이 사건을 교제 살인이라 주장하는 이유다.
유족은 처음엔 사건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A씨가 자신의 범행을 인정하고, 그에 맞는 죄를 받겠다고 하면 될 일이었다. 응당 그러지 않을까 생각했다. 장례 절차를 밟으랴, 경찰서에 다니랴 정신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나 A씨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빈소가 차려진 지 이틀째 되는 날 "한동안 나를 찾지 말아달라"면서 술병 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게시하는가 하면 재판 날짜가 다가오자 정신의학과에 다니기 시작했다.
식당 주방에서 일하던 임씨는 이 사건 이후 직장을 두 달쯤 쉬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렵사리 일을 다시 시작했지만 쉽게 잠드는 날이 없다고 한다. 이처럼 희생자 가족들은 깊은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용기를 내 사건을 알리기로 했다.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임씨는 "뉴스에서만 보던 일이 우리 가족에게 생길 줄은 몰랐다"면서 "내 동생이, 언니가, 누나가, 딸이 언제든지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엄벌에 처해달라"고 호소했다. A씨에 대한 세 번째 재판은 12일 오후 2시 수원지법 성남지원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