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프랭클린은 만 24세 되던 1730년, 다른 여인이 낳은 아이를 데리고 데보라와 결혼했다. 당시 데보라는 프랭클린을 기약 없이 기다리다 집안 어른들의 성화에 못 이겨 한 영국인과 결혼했다가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4개월 만에 헤어진 뒤였다.
사업가로 성공한 프랭클린은 1740년대 무렵부터 정전기, 피뢰침 연구에 몰두해 과학자로서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 됐고, 50년대부턴 펜실베이니아 의회 서기와 의원 등을 거치며 정치인으로서 입지를 다져 나갔다. 1757년 그는 식민지 대표 자격으로 영국에 파견돼 76년 귀국할 때까지, 중간에 필라델피아로 복귀한 2년을 빼고 만 16년간 데보라와 떨어져 살았다. 그의 주변에는 늘 여자들이 있었다. 식민지 청교도 정치인들의 꽉 막힌(?) 스타일과 달리, 호탕하고 자유분방한 그의 성정은 영국 정가에서도 큰 매력을 발휘했다. 무엇보다 그는 열렬한 왕당파였다.
그는 1776년 7월 미국 독립선언서 발표 직전 귀국해 선언문에 서명했고 그해 10월 프랑스 대사로서 다시 대서양을 건넜다. 11월 14일 런던 일간지 ‘세인트 제임스 크로니클(St. James Chronicle)은 “(영국 유력 정치인들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친구라고 자랑스러워하던 바로 그 프랭클린 박사가 지금 북미에서 반란을 주도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뉴스를 특종 보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뉴저지의 왕당파 주지사였던 그의 장남 윌리엄은 영국 편에 섰다가 투옥됐다.
당대 미국 정치인들이 지니지 못한 그의 호방함과 유머 감각은 루이 16세 궁정과 파리 상류사회, 특히 프랑스 정계 고위층의 의사를 좌지우지할 만큼 영향력이 있던 귀족 부인들을 단숨에 매혹시켰다. 외교관으로서 품위를 위협할 정도였다는 그의 사생활이 문제가 돼 본국으로 소환될 뻔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사학자들은 프랭클린이 없었다면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의 군사 원조는 실현되기 힘들었고, 전쟁 승패도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