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순천 10·19 사건 당시 암매장지에 묻힌 유골들의 신원 규명이 난항을 겪을 것으로 전망된다. 국무총리 소속 '여수·순천 10·19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을 위한 위원회'(여순중앙위)가 지금껏 단 한 차례도 유족들의 유전자(DNA) 정보를 수집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나면서다.
11일 여순중앙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8일 서울대 산학협력단에 의뢰, 여순사건 유족들을 대상으로 한 첫 DNA 검사에 나선다. 여순중앙위는 9개월간 특정 염기서열이 반복되는 횟수를 분석(STR)하는 방식을 사용해 발굴된 유골들의 신원을 확인한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생색내기용 검사'가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여순중앙위는 지난 2년간 구례군 산동면 이평리 횟골, 담양군 대덕면 문학리 옥천골 등 2곳에서 유골 26구를 발굴하는 데 그쳤다. 여순사건 피해자들이 집단 암매장된 장소는 구례 산동면 꽃쟁이골, 구례 간전면 간문천, 여수 만성리 형제묘, 고흥 점암면 당고개 등 최소 50여 곳에 달한다. 지난 2022년 제정된 여순사건 특별법 역시 '집단 학살지, 암매장지 조사 및 유골의 발굴·수습 등에 관한 사항'을 여순중앙위 주요 업무로 못 박고 있다.
이마저도 이 유골들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여순중앙위가 지난 2년간 발굴된 유골과 비교해야 할 유족들의 DNA 샘플 정보를 수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5·18민주화운동 진상조사위원회가 먼저 유족들의 DNA 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한 뒤 발굴된 유골과 유전자 정보를 분석했던 것과 대조적이다.결국 여순중앙위는 급한대로 유골과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족 100명만 선별한 뒤 이들의 DNA 샘플을 수집·분석하기로 했다.
더욱이 암매장지 발굴을 차일피일 미루다 지난해 11월에야 착수했다는 점도 문제다. DNA 분석은 사람마다 차이가 나는 특정 유전자 부위를 비교하는 것으로 이를 ‘DNA 마커’라 부른다. 76년 전 땅에 묻혀 부식된 유골에서 올바른 DNA 마커를 찾는 것은 단기간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1980년 발생한 5·18 민주화운동 진상 조사 당시에도 2019년 12월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 묘지에서 발굴된 유골 262기에 대해 4년간 DNA 대조 작업을 벌였지만, 끝내 주인을 찾지 못했다. 가뜩이나 유족들이 고령으로 하나, 둘 세상을 떠나는 데다, 이미 공식적인 조사 활동도 종료돼 추가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유골들의 주인이 누구인지 영영 가릴 수 없게 된다.
박소정 여순 10·19 범국민연대 운영위원장은 "기록 상 확인된 여순사건 집단 학살지만 수십여 곳에 달하는 데 단 2곳에 대해서만 유골 발굴을 진행하고 이 시점에 DNA 조사에 착수한다는 것 자체가 여순사건을 축소하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며 "보여주기식 조사가 목적이 아니냐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여순중앙위 관계자는 "처음 조사를 진행하다 보니 유족들의 DNA 정보를 먼저 수집해야 한다는 점을 미처 간과하지 못했다"며 "유해 발굴 조사 문제는 오랜 시일이 소요돼 정확한 암매장 위치를 알지 못하는 데다 토지 소유주의 승낙 등 문제가 있어 미뤄진 것"이라고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