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의 뒤틀린 인식, 자신 비판하면 '반국가세력' '종북주사파' 매도
12·3 불법계엄 사태 핵심 인물인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공소장이 공개됐다. 김 전 장관(124차례)보다 윤석열 대통령(141차례)이 더 많이 등장하며, 윤 대통령을 중심으로 계엄이 준비·실행된 전 과정을 담고 있다. 국정 운영에 실패한 본인의 무능력을 성찰하는 대신, 비판 세력을 '반국가세력', '종북 좌파'로 치부한 윤 대통령의 왜곡된 현실인식이 계엄의 발단이 됐다. 5일 국회가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은 김 전 장관 공소장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지난해 3~4월부터 최소 9차례에 걸쳐 '비상조치’, '비상대권' 필요성을 주장했다. 자신의 국정운영에 반대하는 '반국가세력'이 존재한다는 게 이유였다. 윤 대통령은 서울 용산구 대통령 관저 등에서 김 전 장관을 비롯해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특수전사령관,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 등을 만나 정치인, 노동계 인사 등을 언급하면서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므로 비상조치권을 사용해야 한다", "특별한 방법이 아니고선 해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점차 발언 수위를 높여가던 윤 대통령은 지난해 11월에는 본인이 자초한 '명태균 공천개입 의혹' 등을 언급하며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대국민 담화문에서도 그의 왜곡된 인식이 드러났다. 12·3 계엄 선포 담화에선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 척결"을 명분으로 내세웠고, 계엄 실패 후인 같은 달 12일 담화에선 "이런 사람들(야당 정치인)이야말로 나라를 망치려는 반국가세력"이라고 주장했다. 윤 대통령 측은 여전히 '계엄은 대통령의 헌법적 권한'이라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체포영장 집행에 불응하고 있다. '헌법 틀 내에서의 권한 행사'였다는 윤 대통령 주장과 달리 계엄 목적과 과정 모두 위법했다는 점도 드러났다. 윤 대통령은 계엄 선포 당일 국무위원 등에게 소집 이유를 알려주지 않은 채 '대통령실로 빨리 들어오라'고 연락했다. 먼저 도착한 한덕수 국무총리 등 국무위원은 계엄에 적극 반대했다. 한 총리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 경제가 아주 어려워진다"고 했고, 다른 장관들도 "비상계엄 선포는 70년 동안 대한민국이 쌓은 성취를 무너뜨리는 것"(조태열 외교부 장관), "경제와 국가 신인도에 치명적 영향을 준다"(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며 만류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다시 '종북 좌파'를 언급하며 계엄을 밀어붙였다. 그는 "종북 좌파들을 이 상태로 놔두면 나라가 거덜 난다"며 "국무회의 심의했고, 발표를 해야 하니 나는 간다"고 자리를 떴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하자 있는 국무회의'로 칭하면서 "비상계엄 선포에 대한 대통령의 일방적 통보만 있을 뿐, 실질적 논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국무회의록도 전혀 작성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내란죄 구성요건인 국헌문란에 해당하는 국회 무력화 시도도 뚜렷했다. 윤 대통령은 계엄 선포 후 최상목 부총리에게 △국회 운용 자금의 완전 차단 △국가비상입법기구 관련 예산 편성 등을 지시했다. 국회를 무력화한 뒤 기능을 대체할 입법기구 운영을 계획한 정황으로 볼 수 있다. 과거 내란죄로 처벌받은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벌인 뒤 계엄 업무를 지휘·감독하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국회 권한까지 부여해 입법권을 빼앗은 바 있다. 노골적인 국회의원 체포 명령도 있었다. 윤 대통령은 이 전 사령관, 곽 전 사령관 등에게 "총을 쏴서라도 (국회의사당) 문 부수고 들어가 끌어내라", "의결정족수가 안 채워진 것 같으니 빨리 국회 안으로 들어가 의사당 안에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오라"고 명령했다. 불법 체포를 막은 건 현장으로 달려간 시민들이었다. 국회 바깥에선 수백 명의 시민이 계엄군의 국회의사당 정문 봉쇄와 '체포조' 출동을 막았고, 의사당 안에선 당직자 등이 유리창을 깨고 침투한 특전사 병력에 소화기를 분사하며 맞섰다. 알려지지 않았던 위기의 순간들도 공소장을 통해 드러났다. 곽 전 사령관은 국회의사당 진입을 막는 시민들을 제압할 목적으로 계엄사령관을 맡았던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에게 테이저건과 공포탄 사용 승인을 건의했다가 거부당했다. 하마터면 유혈 사태로 번질 뻔한 것이다. 계엄군은 윤 대통령 측 주장과 달리 비상계엄 당일 5만7,735발에 달하는 실탄까지 동원했다. 2차 계엄을 준비한 정황도 포착됐다. 윤 대통령은 4일 오전 1시쯤 비상계엄 해제요구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뒤에도 해제를 발표하지 않고 오전 1시 16분부터 약 30분간 합동참모본부 지하 결심지원실(결심실)에서 김 전 장관, 박 총장, 인성환 국가안보실 2차장 등과 회의했다. 이후 김 전 장관은 오전 2시 13분쯤 곽 전 사령관에게 '중앙선관위 병력 재투입'을 문의했다. 앞서 윤 대통령이 이 전 사령관에게 "(계엄) 해제됐다 해도 내가 두 번, 세 번 계엄령 선포하면 되니까 계속 (체포) 진행해"라고 명령한 사실을 고려하면, 계엄을 다시 선포하려 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검찰은 윤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을 위헌·위법하다고 결론 내렸다. 애초 한국의 상황이 헌법상, 계엄법상 계엄을 선포할 수 있는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 데다 "헌법상의 국민주권제도, 의회제도, 정당제도, 선거관리제도, 사법제도 등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려는 국헌문란의 목적"으로 계엄을 실시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