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절정 시기가 예년보다 2주나 늦어졌어요. 아직도 나뭇잎이 푸릇푸릇하니 단풍놀이하러 온 탐방객들이 기대감에 왔다가 실망하고 돌아가네요.”
광주광역시 무등산 인근에서 유료 주차장을 운영하는 길강일(41)씨는 지난 6일 썰렁한 주차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씨는 “매년 단풍철인 10월 말부터 11월 초 사이엔 한꺼번에 차량 200대를 수용할 수 있는 주차장이 하루 종일 꽉 찼는데 요즘은 많아야 40~50대 정도 차는 수준”이라며 “이러다가 ‘지각 단풍’은 고사하고 단풍이 아예 실종되는 현상까지 나타나는 게 아닌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올해 이상 기후에 따른 기록적인 폭염에다 이례적인 가을 늦더위로 단풍 시작·절정 시기가 늦어지면서 이른바 단풍 대목을 기대하던 지자체와 지역 상인 등이 울상이다. 예상치 못한 초록 단풍에 관광객 발길이 뜸해지면서다. 단풍 명소가 있는 지자체마다 늦가을 정취를 만끽하려는 이들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10일 기상청에 따르면 국내에서 가장 먼저 단풍이 시작하는 곳으로 알려진 강원도 설악산은 평년보다 6일 늦은 10월 4일 첫 단풍이 관측됐다. 전북 남원 지리산은 평년보다 14일 늦은 10월 25일, 정읍 내장산은 11일 늦은 10월 31일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다. 산 전체의 80%가량 물들어야 하는 절정 시기가 늦어지면서 탐방객 수도 줄어들었다. 지난달 19일부터 이달 6일까지 내장산국립공원이 집계한 탐방객 수는 14만3,206명으로 전년 동기간(19만2,721명)보다 4만9,515명이 감소했다. 내장산국립공원 관계자는 “작년 이맘때만 해도 단풍 절정기는 진즉 지났다”며 “하지만 올해는 덥다가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는 바람에 단풍이 물들기도 전에 잎이 떨어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단풍이 물드는 시기가 늦어지다 보니 전국에선 ‘단풍 없는 단풍 축제’가 속출했다. 전남 구례군 관계자는 “매년 10~11월 ‘지리산 피아골 단풍 축제’를 여는데 올해는 단풍이 늦게 들어 축제 기간을 이틀에서 하루(10월 26일)로 단축하다 보니 관광객도 작년보다 절반이 줄었다”고 말했다. 대구 팔공산 갓바위 상가번영회 관계자는 “두 달 전 축제 일정을 잡았기 때문에 예정대로 10월 25~27일에 ‘팔공산 단풍 축제’를 진행했는데 산 전체의 30~40% 정도만 단풍이 들었다”며 “단풍 절정 시기에 맞춰 축제 기간을 정하기 위해 앞으로 고민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갈수록 단풍이 늦어지는 이유로 높은 기온과 잦은 비를 꼽는다. 단풍은 최저 기온이 5도 이하로 떨어져야 물이 드는데, 10월 평균 온도가 매년 상승하고 있어서다. 단풍 명소가 있는 정읍·무주·남원의 올해 10월 평균 기온은 평년보다 1.6~1.7도 높았다.
김동학 국립수목원 정원식물자원과 임업연구사는 “단풍은 잎의 녹색 엽록소가 빠지면서 서서히 색이 변하는 현상으로 이 시기 잎에 남아 있는 영양분을 회수한다"며 “단풍 색이 제때 들지 않고 잎이 일찍 떨어지면 해당 식물이 영양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해 성장에 문제가 생기게 되고, 곤충의 먹이 활동에도 지장을 줘 결국 생태계 전반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각 지자체는 단풍 절정기가 언제 올지 예의 주시하면서 단풍 명소 주변 관광지나 관광 상품을 추가로 발굴해 관광객을 모으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남 장성군은 해마다 단풍놀이하러 오는 탐방객 수가 줄어들자 3년 전부터 백양사 단풍 축제를 중단하고, 아예 절에서 가요·재즈·국악 등 다양한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산사음악회’로 행사 내용·형식을 바꿔 열고 있다. 지난해 백양사 입장료를 폐지했고 올해는 주차 요금도 없앴다.
정읍시는 내장산 곳곳에 숨어 있는 자연 경관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새로운 트레킹 코스를 선보였다. 3시간 코스인 ‘오색단풍 히든길(추령부터 내장산국립공원)’과 2시간 코스인 ‘산천유수 히든길(솔티마을부터 내장산관광테마파크)’을 개발했다. 경북도와 강원도는 각각 김천 김밥축제와 원주 만두축제 등 지역 특산품과 자원을 활용한 가을 축제를 기획했다. 관광객이 단풍놀이 외에 가을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선택지를 주기 위해서다.
최영기 전주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는 “기후 위기 시대인 만큼 관광과 축제 패러다임도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며 “계절별로 자연에만 의존하는 형식에서 벗어나 동네 시장이나 뒷동산 등 사시사철 우리 주변과 일상에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관광·축제 콘텐츠라야 지속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