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2016년 대선 당시 '가난한 백인들'의 상실감과 분노를 파고들어 승리했다. 당시 승리 방정식을 이번엔 흑인과 히스패닉·라틴계에 적용했다. 극심한 물가 상승과 취업난 등 경제난을 호소하는 유색인종 노동자들을 향해 "이민자를 쫓아내 일자리를 지켜주겠다"고 큰소리쳤다. 이들은 환호했다. 4년 전 재집권에 실패한 후 '다인종 노동자 정당'으로 외연을 넓힌 공화당의 전략이 제대로 먹혔다는 평가가 나온다.
트럼프 당선자는 2016년 저학력·블루칼라 백인 남성들의 좌절을 읽어내 대선에서 승리했다. 당시 가난한 백인들의 상실감은 공직 경험 하나 없는 70세 부동산 재벌을 미 대통령으로 밀어 올렸다. 하지만 전반적인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저학력 백인 노동자 그룹은 자연스럽게 세(勢)가 줄기 마련이란 문제의식이 공화당에 퍼졌다. 공화당에 필요한 건 기존 유권자들의 결속력보다 표의 확장성이었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안팎에선 다양한 인종을 끌어안지 못하면 재집권은 또 멀어진다는 경고가 나왔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6일(현지시간) "기존 지지자들의 표를 쥐어 짜내는 대신, 이들의 공백을 보완할 수 있는 소수 그룹으로 눈을 돌렸다"며 "모든 인종의 노동 계층 유권자를 끌어들이는 당이 되길 바랐고 그런 공화당의 목표는 이뤄졌다"고 분석했다. 미 뉴욕타임스도 "10년 이상 백인 지지율이 압도적이었던 공화당은 유색 인종 흡수가 필요했다"며 "트럼프가 이걸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트럼프 지지가 가장 눈에 띄는 유색인종 그룹은 라틴계다. 여론조사기관 에디슨리서치가 대선 당일(5일) 실시한 출구조사에 따르면 라틴계 유권자의 트럼프 지지율은 46%로, 2020년(32%)보다 14%포인트 상승했다. 역대 공화당 후보 중 라틴계 지지율이 가장 높았던 2004년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기록(44%)도 넘어섰다. 특히 라틴계 남성 55%, 여성 38%의 지지를 얻었는데, 이는 직전 대선보다 각각 19%포인트, 8%포인트씩 증가한 결과다.
미 CNN방송의 출구조사에서도 트럼프 당선자는 라틴계 남성 유권자 그룹에서 54% 지지율을 얻어 민주당 대선 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44%)을 10%포인트 차로 앞서는 이변을 연출했다. 2020년 대선 때만 해도 바이든 대통령이 23%포인트 우위에 있었던 격차를 아예 뒤집은 것이다.
히스패닉·라틴계는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세가 강했다. 트럼프와 공화당은 불법 이민자와 경제 문제와 관련 지어 이들의 좌절과 울분을 읽어냈다. 트럼프 당선자는 지난달 '선벨트'(일조량 많은 남부 지역) 경합주 중 한 곳인 애리조나주 매리코파카운티를 찾아 이 지역의 30%가량을 차지하는 히스패닉을 겨냥, "히스패닉과 흑인은 수백만 명의 국경 침입으로 일자리 위기에 놓였다"고 말했다. 어떻게 일자리를 만들지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 것도 아니었다. 민주당을 '현실감각 없는 진보주의자들'로 규정하고 "불법 이민을 막아 일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촉구했을 뿐이다.
민주당 집권 4년간 치솟은 물가, 취업난, 높은 이자율에 등골이 휜 이들, 특히 청년들은 환호했다. 공화당 미디어 전략가 지안카를로 소포는 "젊은 히스패닉 유권자들은 50년간 민주당에 투표해 온 조부모와 기억을 공유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랜 기간 소수 인종 유권자 지지에 의존해 온 민주당은 이번 패배가 유독 뼈아프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이른바 고학력 엘리트 유권자 지지 호소에 치우쳐 왔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잇따른다. 리치 토레스 민주당 하원의원은 "히스패닉 등 유권자 손실은 우리 당으로선 재앙이나 다름없다"며 "민주당이 노동계층 유권자들과의 접점을 끊고 대학 교육을 받은 극좌파에 사로잡혀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