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도 촛불도 없었다. 조화는커녕 영정사진마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지난 5일 오후 추모를 위해 모인 곳은 서울 용산구 한 호프집. ‘추모객’들은 그들을 위해 마련된 듯한 오목한 구석 공간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눴다. 지난달 25일 59세로 세상을 떠난 일본인 영화 저널리스트 쓰치다 마키를 위한 자리였다.
쓰치다는 “한국인들보다 한국 영화를 더 사랑하는 일본인”으로 한국 영화계에 널리 알려졌다. 그는 30년가량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취재했다. 한류라는 말이 없던 시절부터 일본에 한국 대중문화를 알렸다. 한국 영화 제작 자문에 참여하기도 했고, 영화계 번역 일을 한 적도 있다. 일본 영화 ‘밤으로’(2022)에 공동 제작자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영화 쪽에서 오랜 기간 활발히 활동하다 보니 배우와 감독 등 그를 아는 한국 영화인들이 적지 않았다. 고인은 생전에 “조상이 일본으로 건너온 백제인일지 모른다”는 농담을 할 정도로 한국 사랑이 깊었다. 한국 영화인들이 그를 부르던 애칭은 ‘마키상’이었다.
고인이 한국 대중문화에 빠져든 건 우연이었다. 일본 규슈공립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후 1989년 고려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한국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그는 영화사에 다니던 한국 여성과 교제하면서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주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월간 문화잡지 ‘서울스코프’에서 영화 담당 기자로 일하며 한국 대중문화를 본격적으로 취재했다. 서울스코프를 나온 후에는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다. 2015년에는 한국일보 ‘한국에 살며’ 코너에 정기 기고를 하기도 했다. 고인은 제34회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일본 홋카이도 유바리시를 찾았다가 심근경색으로 숨을 거뒀다. 고인은 지난달 24일 인천공항에서 여객기를 타기 전 쓰러졌으나 홋카이도행을 강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의 죽음은 일본 나카타 게이 감독이 페이스북에 29일 부고를 올리면서 뒤늦게 알려졌다. 영화를 지독히도 사랑한 이의 영화 같은 마지막 여행이었다.
이날 추모를 위해 술자리에 참석한 이들은 스무 명 남짓이었다. 대부분 한국 영화인 또는 기자였다. 모임을 주도한 오동진(영화평론가)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 김동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 강상욱 미디어캐슬 대표, 주희 앳나인필름 이사 등이 자리를 지켰다. 배우 김의성은 조의금을 대신해 술자리 찬조금을 보내왔다. 고인과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주한 일본인들도 다섯 명 정도 눈에 띄었다.
오 위원장이 “슬픔으로 자리를 채우지 말자”고 당부하며 시작한 모임이라 그런지 추모 자리치고는 떠들썩했다. 고인과의 추억이 술 안주로 올랐고, “최근 식사 한번 함께 제대로 못 했다”는 아쉬움과 “여름에 맛집에서 밥을 살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위안이 오갔다. “고인이 좋아했던 한국 영화와 관여했던 작품들을 모아 내년에 특별전을 열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고인은 고향인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 영면에 든 것으로 알려졌다. 오 위원장이 “내년에 고인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겠다”고 하자 합류를 약속하는 목소리들이 나왔다. 이날 모임은 밤 11시 30분이 돼서야 끝났다. 쓰치다의 급작스러운 죽음에 지난 일주일을 쓸쓸한 마음으로 보냈던 이들은 온기를 조금이나마 얻고 호프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