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풍경은 이야기를 곁들여야 더 깊고 풍성해진다. 조선시대 궁궐이 특히 그렇다. 해설사와 동행해 조선 왕실과 각 건물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며 가을 창경궁을 찬찬히 걸었다. 창경궁 무료 해설은 오후 1시 포함,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옥천교 옆에서 시작한다. 관람료는 성인 1,000원이며 매주 월요일 휴무다.
창경궁은 1483년 성종이 세 명의 대비(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를 위해 세종이 창건한 수강궁을 크게 확장하며 명명한 궁이다. 창덕궁과 경계가 없는 동궐(東闕)로 주로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후 중건했고, 1830년 대규모 화재로 거의 모든 전각이 소실되고 다시 재건했다.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07년 순종이 왕위에 오른 후 궁 내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조성되고, 1911년에는 일제가 명칭을 창경원(昌慶苑)으로 바꾸며 원래의 모습이 심하게 훼손됐다. 한 나라의 궁궐이 놀이공원이 되고 말았다. 창경원이 창경궁으로 명칭을 회복한 건 한참이 지난 1983년이었다. 동물원을 이전하고 지금의 모습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입구 홍화문(弘化門)을 시작으로 무지개다리 옥천교(玉川橋), 명정문(明政門)을 차례로 통과하면 창경궁의 정전이다. 왕의 즉위식과 하례, 과거시험과 궁중연회 등 중요 국가행사를 치르던 명정전(明政殿)이 등장한다.
앞마당 조정(朝廷)에는 울퉁불퉁한 박석이 깔렸다. 빗물이 고이지 않게 하는 동시에 이동할 때 조심하느라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도록 만든 장치다. 삼도(三道)는 궁궐의 격식이다. 중앙의 어도는 왕이 이동하는 길이다. 좌우의 품계석도 시선을 끈다. 조회 때 문무백관이 각자의 품계에 맞춰 서는 자리다. 국왕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무관, 좌측에는 문관이 섰다.
명정전으로 오르는 계단 가운데에 경사진 돌 답도(踏道)가 있다.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한 쌍의 봉황을 새겼고, 그 위로 국왕이 탄 가마가 지나다녔다. 성종 15년(1484) 건립된 명정전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됐다가 광해군 8년(1616) 재건됐다. 조선 궁궐의 정전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기와지붕 추녀마루에 악재를 막는 어처구니(잡상)가 눈길을 잡는다. 기와장이들이 궁궐을 짓다가 어처구니를 깜빡 잊고 올리지 않은 데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이 유래됐고 한다. 어좌 뒤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는 해와 달, 다섯 봉우리를 표현한 그림이다. 태양은 왕, 달은 왕비를 상징한다. 이 둘을 포함해 그림 속 물과 소나무 모두 십장생이다. 왕과 왕비의 무병장수와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어좌 위 보개천장(寶蓋天障)에는 구름과 봉황이 조각돼 있다.
문정전(文政殿)은 왕이 신하로부터 업무 보고를 받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집무실이다. 일제강점기 때 불탄 것을 1986년에 복원했다. 1762년 7월 아버지 영조와 갈등을 겪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세상을 떠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숭문당(崇文堂)은 왕이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논하던 곳이고, 함인정(涵仁亭)은 왕실 의례 및 잔치를 벌이던 곳이다. 과거 합격자들을 불러 모으고 신하들과 경서를 읽던 곳으로 사방이 벽체 없이 시원하게 개방돼 관람객의 휴식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왕이나 왕세자가 생활하던 내전인 환경전(歡慶殿), 성종이 어머니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를 위해 지은 침전 경춘전(景春殿)도 있다. 대비 뿐 아니라 왕비와 왕세자빈의 생활공간이었다.
통명전(通明殿)은 왕비의 침전으로 연회나 의례를 여는 넓은 마당에 동그란 샘과 연못을 갖췄다. 주변에 정교하게 돌난간을 두르고 작은 돌다리를 놓아 궁궐생활의 단조로움을 달래주었다. 양화당(養和堂)도 내전으로 활용했다. 계단을 올라 느릿느릿 걷다가 고개를 돌리면 궁궐과 남산이 손에 잡힐 듯하다. 저절로 사진을 찍게 되는 근사한 풍경이 펼쳐진다.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하는 깃발을 세운 풍기대(風旗臺),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 성종태실비(成宗胎室碑)를 지나면 숲길로 이어진다. 수목은 아름답고 공기는 상쾌하다. 울긋불긋 단풍이 올라 기분도 좋아진다.
느릿느릿 걷다가 춘당지(春塘池)에 멈춘다. 현재 연못이 두 개지만 원래는 춘당지는 뒤쪽의 작은 연못이다. 큰 연못은 왕이 직접 농사 의식을 행하던 내농포였다. 1909년 일제가 연못을 파 유원지로 바뀌었고, 1986년 창경궁을 복원하며 가운데에 섬을 만들고 한국 전통양식에 가깝게 조성했다. 호수 위아래가 똑같은 데칼코마니 풍경이 펼쳐진다. 불그스레하게 가을 색이 더해져 비경을 연출한다.
군사들이 활쏘기나 말 타기 연습을 하던 관덕정(觀德亭)과 사계절 야생화가 피고 지는 작은 정원을 지나면 대온실이 나타난다. 철골과 목조가 혼합된 골격을 유리로 감싼 한국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국내 자생식물을 전시하고 있다. 창경궁 해설 투어는 이곳에서 마무리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