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말, 뉴욕 스테파니킴 갤러리는 '스토리드: 냉전의 유산' 전시를 열었다. 비평가와 컬렉터 모두 강한 공감을 표현했는데 민감한 사회·정치적 상황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시작들은 미국 유권자들 사이에서 큰 분열을 초래한 주제, 즉 전쟁, 이민, 임신중지(낙태)법, 총기규제 등을 다뤘다.
도널드 트럼프의 우세가 예상됐던 만큼 관객들은 자연스레 선거에 대해 논의했다. 미국 대통령을 뽑는 선거지만, 세계 전반에 미치는 다양한 영향들에 대한 평가가 있었다. 또 이번 선거를 냉전의 유산이라는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런 논의는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지만, 작가와 관객들이 냉전이 초래했던 다양한 스펙트럼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50년대 냉전 시대, 미국 시민이 느낀 핵전쟁의 공포를 삽화로 확대한 트레이시 바이스만의 작품 'Duck and Cover'를 보며 한반도 핵도발이 떠오른다는 관객도 있었다. 냉전 시기에 성장하며 실존적 공포를 실감했던 70대 컬렉터는 "현재 미국 학교에서 실시되는 총기 난사 대비 훈련 같다"고 말했다. 한 비평가는 핵폭격을 피하려고 몸을 웅크리고 숨는 행동의 부조리가, 선동적 소셜미디어에 휘둘리는 유권자들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기력함 같다고도 토로했다.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예술가들의 목소리가 미국 전역에 강하게 나타났다. 셰퍼드 페리는 5개 경합주에서 대형 벽화를 그리며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고자 했고, '카멀라를 위한 예술가' 모금 운동에는 100명이 넘는 작가가 참여했다. 제프 쿤스, 카라 워커, 재스퍼 존스, 제니 홀저와 같은 영향력 있는 예술가가 참여, 작품을 기증하고 15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창출했다. 이처럼 예술은 선거와 투표에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며, 가치를 창출할 수 있기에 효과적이다.
이 가운데 제니 홀저는 트럼프에 대한 비판을 꾸준히 해왔다. 하우저&워스 갤러리에서 2022년 전시한 '저주받은'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저주하는 사람들의 메시지를 판에 적은 뒤, 저주를 담아 오물을 뿌리고, 무덤에 묻고 우물에 던졌던 고대 로마의 풍습을 재연했다. 홀저는 금속판에 트럼프의 트윗을 새기고 이를 부식시키고, 여러 자극을 가해 오래된 유물인 것처럼 꾸몄다. 300여 개 넘게 만든 작품에는 "당신과 당신의 자녀는 바이든의 미국에서 안전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누구도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 메시지가 담겼다. 올해 구겐하임 미술관의 제니 홀저 회고전에도 이 작품 시리즈가 포함됐다. 유수 미술관의 회고전은 그만큼 예술적 명성과 시장 가치를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는데, 거침없는 그의 행보가 대단하다.
갈등과 논쟁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예술가들에게도 빛을 비출 수 있다. 실제로 동유럽 조지아의 논란이 되고 있는 선거는 세계의 관심을 그 나라 예술가들에게 집중시키고 있다. 조지아 시민들은 인근 우크라이나 전쟁을 바라보며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최근 친러 정부가 선거에 승리하자 예술가들이 저항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예술가, 큐레이터, 컬렉터들은 어려운 시기일수록 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시대와 공명하는 작품, 작가, 전시는 가치를 창출하는 큰 동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