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가 앞서 9월 통화정책회의에서 금리를 0.5%포인트 내리는 '빅컷'을 단행했다. 금리인하 사이클이 시작됐음을 알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국채 10년물 수익률은 4%대로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금리인하를 무색하게 하는 장면이다. 한때 미국의 경기침체 여부가 논쟁이었으나, 이제는 9월 빅컷이 옳았는지 왈가왈부하는 상황이다. 연준의 주된 임무는 크게 두 가지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것과 경기 부양으로 일자리를 창출해 실업률을 낮추는 것. 물가와 고용을 바라보는 연준 인사들의 시각이 다를 수 있다. 연준은 2000년대 초 정보기술(IT) 업체 주가 폭락(닷컴 버블 붕괴),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2020년 코로나19 사태 등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통화정책 수단을 적극 활용했다. 이번 빅컷 단행에도 불구하고 1,400원에 육박하는 고환율을 보면서 시장 예측이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중동 분쟁과 미국 대선의 불확실성이 시장에 잠재적 리스크로 떠오르는 상황에서 연준의 금리인하 역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폴 볼커의 시기를 돌아보자. 1971년 8월 닉슨 쇼크(미국의 금 태환 제도 폐지)로 금과 고리가 끊어진 달러는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됐다. 당시 아서 번스 연준 의장은 인플레이션 수치를 가능한 한 낮게 보이기 위해 묘수를 낸다. 연준 위원들의 반대에도 소비자물가지수에서 변동성이 큰 식음료와 유가를 제외한 ‘근원 인플레이션 지수’를 만들었다. 연준은 근원 인플레이션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달러를 무제한 발행했다. 이렇게 찍어낸 달러로 1979년 2차 석유 파동 당시 미국의 인플레이션율은 13.3%까지 치솟았다. 이 상황에서 연준의 해결사로 등장한 인물이 볼커였다. 그는 인플레이션과 싸우기 위해 1979년 10월 기준금리를 11.5%에서 15.5%로 4%포인트나 올렸다. 주식과 집값이 폭락하고 기업의 파산이 잇따르며 실업자 수는 폭증했다. 1980년 대선에서 카터는 ‘신자유주의와 감세 정책’을 내세운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했다. 볼커의 고금리 정책이 패인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후 볼커는 더 독하게 긴축 정책을 밀어붙여 살해 위험까지 몰렸다. 1980년 6월 인플레이션율이 14.8%까지 치솟자 기준금리를 20%까지 올렸다. 빚더미에 앉게 된 이들이 트랙터를 몰고 워싱턴으로 상경하고 연준 건물을 봉쇄하며 볼커의 퇴진을 요구했다. 1981년 중반 들어 볼커의 배짱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금 이자가 높아 돈이 은행으로 몰렸다. 은행 우대 금리 21.5%와 당시 인플레이션 14.5% 차이는 컸다. 시중 유동성이 줄어드니 인플레이션이 잡히기 시작했다. 14.8%까지 올라갔던 인플레이션율은 1981년 9%로 꺾였다. 1982년에는 목표치 4%에 도달해, 볼커가 긴축을 풀자 경제는 힘차게 살아났다. 이듬해에는 경제가 살아나면서도 인플레이션은 2.4%까지 떨어졌다.
앨런 그린스펀이 연준 의장으로 취임한 1987년 10월 19일 주가가 20% 넘게 빠지는 '블랙먼데이'가 발생했다. 연준은 금리인하로 이에 대응했다. 이후 경제 회복으로 물가상승률이 5%를 넘게 되자 그린스펀은 금리를 급격히 인상한다. 1990년 경기침체가 닥치자 연준은 다시 방향을 바꿔 그해 7월부터 1992년 9월까지 기준금리를 8.0%에서 3.0%로 인하한다. 그린스펀의 금리인하 결정이 너무 늦었다는 비판이 나왔으나 경기침체는 8개월 만에 끝난다. 1991년 4월부터 2001년 3월까지 미국 역사상으로 가장 긴 경기확장기가 펼쳐진다. 1994년 이후 연준은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기준금리를 조정했다. 1995년 12월까지 인플레이션이 낮아진 상황에서 연준은 1월에 0.25포인트를 인하해 기준금리를 5.5%로 낮췄다. 완만한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는 완화 정책을 정당화했다. 연준은 그해 기준금리를 4.75%까지 낮췄는데 이는 해외 경기 악화와 미국 경제 성장에 미치는 악영향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2001년 1월 금리인하 조치는 경기하강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닷컴 버블 이후 판매와 생산은 좋지 않았고 소비자 신뢰도 하락, 금융 부문 애로에 정면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연준의 기준금리는 2003년 6월에는 1.00%까지 내려가 45년 만에 최저치를 경신했다.
2004년 6월부터 금리인상 사이클이 시작되고 새 연준 의장에 벤 버냉키가 취임(2006년 2월)한 후 2006년 6월까지 17차례 연속으로 금리가 인상된다. 이런 금리인상에도 불구하고 당시 연준이 좀 더 공격적으로 금리를 올렸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랬다면 금융위기의 씨앗이 된 주택시장 거품을 제어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서다.
2007년 9월 신용 경색이 시작됐다. 금융 시장 혼란이 주택 시장과 광범위한 경제 성장에 지나친 타격을 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 5.25%에서 4.75%로 인하했다. 2008년 10월은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으로 글로벌 신용 위기가 심화했다. 연준은 다른 중앙은행과 공조해 금리를 2.0%에서 1.50%로 0.5%포인트 인하했다. 그해 12월에 금리가 거의 제로에 가까워질 때까지 계속 인하해 7년 동안 유지했다. 이처럼 연준은 경제의 부침에 따라 기준금리를 올리거나 내림으로써 경제를 조절해왔다. 물가상승률이 높았던 시절에는 급격한 인상도 마다하지 않았다. 금융위기가 터진 뒤로는 '제로(0%)' 수준까지 기준금리를 낮추기도 했다.
2019년 7월 연준은 긴축 사이클을 종료한 지 7개월 만에 글로벌 경제 상황과 물가 상승 압력 둔화를 이유로 금리 범위를 2.25~2.5%에서 2~2.25%로 낮췄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2020년 3월에 1.0~1.25%로 0.5%포인트 인하한 데 이어 2주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제로에 가까운 수준으로 인하했다. 팬데믹으로 인한 위험에 직면한 경제를 지원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이 때 풀린 막대한 유동성은 인플레이션이라는 화근을 낳았다. 2022년 초 연준의 금리인상 사이클이 시작되며 자산시장은 거대한 변화와 충격을 감수해야만 했다.
미국 연준의 대응을 이렇게 요약해 보면 어떨까? 1990년대 말 이후 '저금리→IT주 거품→금리인상→시장 위축→금리인하→부동산 거품→금리인상→금융위기→금리인하(제로금리) →물가인상과 자산시장 거품 경계→금리인상→세계경제 악화→금리인하→코로나19 팬데믹→금리인하(제로금리)→9%대 인플레이션 발생→금리인상→물가 안정→금리인하'로 말이다.
이제 세계는 다시 금리인하 사이클을 내다보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당분간 글로벌 금융위기나 코로나 팬데믹 같은 초저금리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물가 경로가 목표치에 도달했음에도 미국 경제가 좋은 상황에서 금리인하에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세계적으로 전쟁 상황이 이어지고 있어 공급망 이슈나 유가발(發) 물가인상을 도외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경기는 좋지 않은데 수도권 부동산 가격 상승과 가계 부채 문제로 금리인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3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2분기보다 0.1% 증가한 수준이었다. 마이너스(-) 성장을 했던 2분기(-0.2%)보다는 나아졌다지만 기대에 못 미친다. 앞서 8월의 한은 예상치(0.5%)를 상당 수준 밑돈 수치다. 그동안 성장을 견인해 오던 수출이 전기 대비 -0.4%의 뒷걸음을 쳤다. 이런 상황을 보며 경제에 숨통을 틔우기 위해서는 세계 경제 상황이 무탈하기를 바라며 금리인하와 경기 상승에 기대를 걸어보자. 금리인하가 경기침체를 동반할 경우에는 주가에 호의적이지 않다. 이번 금리인하는 경기침체를 동반하지 않아 주가에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지만, 너무 많이 오른 미국 주가가 문제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