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병 파병 등 북한과 러시아의 밀착 강도가 점차 세지는 가운데 우리 정부가 중앙아시아와 유럽연합(EU)과의 접촉면 넓히기에 나섰다. 러시아 주변국과의 결속으로 차갑게 식은 한러 대화 우회로를 확보하고, 안보적 견제관계에 있는 국가들을 통해 대러 레버리지를 높이겠다는 계산이다.
조태열 외교장관은 4일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외교장관과 차례로 회담을 갖고, 한-중앙아시아협력포럼에 참석하는 일정을 소화했다.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17차 한-중앙아협력포럼 기조연설에서 조 장관은 "우리의 한반도 정책에 대한 중앙아 국가들의 일관된 지지에 사의를 표한다"며 "(양측) 화해와 협력을 위한 노력들이 유라시아 대륙의 평화와 공동번영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중앙아시아포럼은 2007년부터 매년 열리는 한국과 중앙아시아 5개국의 포괄적 협력관계 구축·심화 목적 고위급 회의체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이 참여하고 있다. 양측 간 협력 수요가 높은 공급망, 환경 및 기후변화, 디지털, 관광 분야를 주로 논의한다.
특히 이번 포럼은 북한과 러시아의 군사협력이 한창 전개되는 가운데 열려 이목을 끌었다. 카자흐스탄 등 5개국은 러시아가 구소련 해체 이후에도 계속 자신의 세력권 내 국가로 여기고 있다. 이들 국가도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와 유라시아경제연합(EAEU)에 가입하는 등 경제와 안보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이 2012년 CSTO를 탈퇴하긴 했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5선 성공 직후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하는 등 협력 관계 유지에 공을 들이고 있다.
우리 정부는 이들 중앙아시아 5개국의 관계 강화가 향후 대러외교에 레버리지가 될 것이란 기대감을 숨기지 않는다. 지난 6월 푸틴 대통령의 평양 방문 직전에 이뤄진 윤석열 대통령의 중앙아 순방 역시 러시아와의 우회적 소통 창구를 노린, 관계 개선 노력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졌다. 윤 대통령은 이날 방한한 중앙아시아 5개국 외교 장·차관들에게 "오랫동안 러시아 및 북한과 소통 채널을 유지해 온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러북 간 군사협력을 저지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경주해 줄 것"이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실제 이들이 북한의 러시아 파병 규탄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기만 한다면, 러시아의 외교적 타격은 만만치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이들은 2022년 3월 유엔총회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결의안에 기권 또는 투표권 포기라는 중립 입장을 견지했다. 지지가 아닌 침묵을 택했다는 점에서 당시 푸틴 대통령의 특별군사작전이 외교적 지지를 잃었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조 장관은 또한 호세프 보렐 EU 고위대표를 만나 회담하고, 양자 간 안보·국방 파트너십을 채택했다. 파트너십은 해양안보, 사이버, 군축‧비확산, 방산 등 15개 안보방위 분야 협력을 도모하는 것으로, 양측은 이를 토대로 점증하는 글로벌 안보 위협에 대한 공동 대응 노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
이번 파트너십은 사실상 우크라이나를 겨냥한 북한과 러시아를 안보적으로 포위·견제할 수 있는 장치 마련에 나선 것으로 평가된다. 보렐 고위대표는 김용현 국방장관과도 만나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을 규탄하고, 러북 불법 군사협력을 차단하기 위한 공조 방안을 논의했다.
조 장관과 보렐 고위대표는 또한 공동성명을 통해 북한의 러시아 파병을 가장 강력한 언어로 규탄했다. 조 장관과 보렐 고위대표는 북한군의 즉각적 철수와 북러 군사협력 중단을 촉구하면서 "북한이 NPT(비확산체제)에 따른 핵보유국 지위를 가질 수 없고, 앞으로도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러시아가 군사협력에 대한 대가로 북한에 무엇을 제공하는 지를 면밀히 주시하면서 국제사회와 함께 필요한 조치들을 적극 강구해 나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