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전쟁의 흑인 노예들

입력
2024.11.0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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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던모어 선언


미국 독립전쟁(1775~1783)이 시작된 지 약 6개월 뒤인 1775년 11월 7일, 영국의 버지니아 총독이던 던모어(Dunmore) 백작 존 머리(John Murray)가 ‘던모어 선언’을 발표했다. 영국군에 합류해 총을 든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예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노예해방 선언이었다. 선언문은 일주일 뒤 관보 격인 ‘버지니아 가제트’에 실렸다. 총독이 혁명군(반란군)에 의해 버지니아 수도 윌리엄스버그를 함락당한 채 남쪽 노포크(Norfork)로 피신해 있던 상황이었다.

‘선언’은 전쟁 발발 직후 일부 흑인 노예들이 먼저 제안했다. 식민지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의 영향력하에 있던 총독은 당연히 코웃음을 쳤다. 급기야 궁지에 몰려 던진 ‘선언’으로 약 800~2,000명의 노예가 즉각 영국군에 합류해 ‘던모어 경의 에티오피아 여단’이란 이름으로 편제됐다. 약 한 달 뒤 혁명군 진영의 버지니아 회의는 농장 이탈 노예는 사형에 처하겠지만 10일 이내에 복귀하면 처벌을 면제한다는 내용의 포고령을 발표했다.

영국군 식민지 총사령관 헨리 클린턴은 79년 6월 혁명군 내부의 사보타주 등을 노려 반란군 진영에서 이탈한 모든 노예를, 영국군에 합류하든 않든 해방하고 새로운 직업을 얻게 돕겠다는 ‘필립스버그(Philipsburg) 선언’을 발표했다. 혁명군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과 건국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 등이 그 과정에서 다수의 노예를 잃었다. 독립-혁명전쟁에서 영국군에 합류한 흑인 남성 노예는 최대 2만 명이었고 혁명군에는 약 5,000~8,000명의 흑인 노예가 복무했다.

78년 5월 종전협정의 영국 측 조건 중 하나가 영국군 소속 흑인 노예들의 자유였다. 그해 약 3,000명의 흑인 노예가 영국과 캐나다, 카리브해, 아프리카 국가들로 이주했고, 훗날 시에라리온 자유민 정착촌 건립의 주역이 된 조지 워싱턴의 노예 해리 워싱턴(Harry Washington)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