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시절 공안 조작으로 간첩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고를 치른 피해자들이 50여 년 만의 재심에서 잇달아 무죄를 선고받았다. 유가족들은 피해자의 뒤늦은 명예회복에 안도의 눈물을 흘리며 검찰을 향해 상소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서울고법 형사10부(부장 남성민)는 고 진두현씨와 고 박석주씨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재심에서 31일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재심 청구인인 배우자가 구순이 넘은 몸으로 선고를 들으러 오신 것을 보면 반세기가 흘렀지만 가족들은 여전히 그때의 고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며 "오늘 판결이 피고인과 유족들에게 아주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두 사람은 '통일혁명당(통혁당) 재건위 사건'의 피해자들이다. 1968년 8월 중앙정보부는 '북한 지령을 받은 인사들이 통혁당을 결성해 반정부 활동을 했다'며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고, 1970년대까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통혁당 재건운동을 진압했다. 그 과정에서 진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6년을 복역하다 사면됐고, 박씨는 징역 10년이 확정됐다.
이후 민간인 수사권이 없는 보안사령부가 사건을 조작하기 위해 불법 체포·구금, 가혹행위를 일삼았던 정황이 드러나면서 피해자들은 재심을 청구했다. 지난해 5월 고 박기래씨의 무죄가 확정되고 두 달이 지나 진씨와 박씨에 대한 재심 개시가 결정됐다. 검찰은 위법 수사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당시 법정 진술은 증거능력이 있다며 이번에도 유죄를 주장했지만, 이날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날 박정희 정권 시절 날조 사건으로 수십 년간 간첩 취급을 받은 피해자에게 무죄가 선고된 다른 판결도 있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4-3부(부장 이훈재)는 1967년 제주의 한 중학교에서 근무하다가 친북 성향 재일동포 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확정된 고 한삼택씨의 재심 항소심에서 1심과 같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은 1심의 무죄 선고에 검찰이 사실오인과 법리오해를 이유로 항소한 것인데 검찰이 제출한 증거는 (피고인이 불법구금 상태에서 한 진술로) 증거능력이 없거나 그 자체만으로 피고인의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부족하다"면서 "당시 사회정치 정세 등을 감안했을 때 피고인의 행위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위험이 있다고 보기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무죄가 선고된 두 법정에선 "감사하다"는 탄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휠체어를 타고 일본에서 건너온 진씨의 배우자 박삼순씨는 취재진에게 "지금까지 이 문제로 50년을 고생하면서도 무죄로 남편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단 심정으로 살아왔다"고 읊조렸다. 한씨의 아들 경훈씨는 "검찰은 피해자들을 괴롭힐 게 아니라 국가를 대신해 사죄해야 한다"며 검찰의 상고 포기를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