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소위원회(소위)에서 만장일치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진정에 대한 기각 및 각하가 가능하도록 안건을 통과시켰다. 위법 소지가 있는 데다 인권 침해나 차별을 당해 진정을 낸 약자들이 피해를 볼 거란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인권위는 28일 열린 전원위원회(전원위)에서 '소위원회에서 의견 불일치 때의 처리' 안건을 의결했다. 기존 3인 체제였던 소위원회를 4인으로 늘리고 안건에 대한 의견이 2대 2 동수일 경우 기각 또는 각하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 뼈대다. 11명의 참석 위원 중 찬성 6명, 반대 4명, 기권 1명으로 안건이 통과됐다. '전원위에 회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안건도 함께 의결됐지만 권고 규정에 그친다는 한계가 있다.
이번 규정 개정은 지난해부터 이어진 진정사건 무력화 움직임의 연장선상이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수요집회 현장에서 역사 왜곡 및 여성 혐오를 일삼는 반대세력을 방치하지 말아 달라는 정의기억연대의 진정을 2022년 1월 접수한 인권위는 긴급구제 조치를 했지만, 이듬해 8월 침해구제1소위에서는 기각 결정을 내렸다. 위원 1명이 인용, 2명이 기각을 내 의견이 엇갈렸는데 위원장 주도로 기각했다. 정의연은 취소 소송을 냈고, 올해 7월 27일 서울행정법원은 "절차가 위법하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소위원회의 회의는 3명 이상의 출석과 3명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한다'는 국가인권위원회법 제13조 2항에 대해 법원은 "의결뿐 아니라 진정을 기각하는 경우에도 3명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20년 넘게 진정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종전의 관행을 뒤집는 것은 평등의 원칙과 신뢰 보호 원칙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이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그러자 인권위는 만장일치가 아닌 경우 기각이나 각하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지난해 10월부터 안건을 상정해 끝내 통과시켰다. "충분한 숙의를 거치지 못할 수 있다"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진정 처리의 시급성'을 든 찬성파를 넘어서지 못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 인권위 구성이 보수화된 것도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그간 소위에서는 위원들 간의 의견이 엇갈릴 경우, 재상정을 거치거나 전원위에 회부돼 인용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2022년 차별시정위원회에 접수된 '변전 전기원의 자격증 말소 관련 규정'에 관한 진정의 경우 소위에서 위원들 간 의견이 좀처럼 모아지지 않았지만 재상정을 세 차례 거친 끝에 지난해 12월 만장일치로 인용됐다. 그러나 앞으론 적잖은 진정이 곧바로 기각될 가능성이 높다. 35개 인권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국가인권위원회 바로잡기 공동행동'은 성명을 내고 "이번 의결은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반한다"며 "최소한의 책임을 망각한 행태"라고 비판했다.
반면 인권위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인권위 관계자는 "2대 2 동수가 될 경우 전원위에 회부하기 위해 노력을 하겠지만, 강제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기 때문에 진정인들의 권리가 일부 제한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면서도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안건이 장기 계류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취지"라고 해명했다. 31일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모종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만장일치 정신을 버리고 동수여도 기각하는 것이 맞느냐"고 질문하자 안창호 위원장은 "법리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