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아이' 살리려 거리에 서는 마음

입력
2024.10.31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오늘 아침 초등학생 아이가 현장체험학습을 떠났다. 전세버스를 타고 한 시간 거리의 과학관에 갔다가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7시간 남짓한 일정이다. 인사하고 뒤돌아선 아이 뒷모습을 보며 추운날 온몸에 소름이 돋듯 그 감각이 되살아났다.

나는 세월호 참사 때 100일도 안 된 신생아를, 이태원 참사 때는 생후 9개월 된 아기를 키우고 있었다. 아기는 타인의 돌봄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취약한 존재였고, 나에겐 아기 돌봄과 보호가 지상과제였다. 그때 두 사건이 닥쳤다. 잠든 아기 옆에 누워 물속에서, 사람들 틈에서 숨을 잃었을 아이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아이들이 학교나 어린이집에서 현장학습을 갈 때면, 두 번이나 몸에 새겨진 이 감각이 나를 덮친다.

불안을 달래고 싶어 세월호 10주기에 읽었던 글을 다시 읽었다. 진은영 시인은 당시 ‘씨네21’에 이렇게 썼다. “그들(세월호 부모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그들이 불행을 겪은 이들이고 우리가 선량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승선한 배의 물 새는 구멍으로 그들이 가장 먼저 달려가, 물이 들어온다고,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물 새는 곳에 가장 먼저 달려가 준 사람들, 고맙게도 이 사실을 크게 외쳐주는 사람들. 나는 그동안 세월호 부모들에게 연민과 부채감만 가졌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 사회가 기대고 의지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이들이 “내 아이는 이미 떠났는데 안전 대책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했다면 어땠을까. 정부는 재빠르게 참사를 지웠을 것이고, 부모들은 더 오래 마음을 졸여야 했을 것이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최근 2주기를 앞두고 참사 이후의 삶을 담은 책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를 출간했다. 출간기념회에서 이정민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이 책을 가장 먼저, 꼭 읽어야 할 사람으로 윤석열 대통령을 꼽았다. 유가족들은 법원이 이태원 참사로 기소된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과 박희영 용산구청장에게 무죄를 선고해 마음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외침을 멈추지 않았다. 대통령에게 “국민의 아픔에 공감해야 한다”며 책을 읽고, 물 새는 곳을 막으라 외쳤다.

나는 이런 부모들을 또 안다. 아이를 교제살인으로 잃은 부모들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을 폭력의 증거를 들고 카메라 앞에, 국회에 선다. 2020년 둘째 딸의 남자친구에게 두 딸을 한꺼번에 잃은 나종기씨도 그중 한 명이다. 몇 번이나 삶을 등지려 할 만큼 삶에 대한 의욕이 꺾였던 그였지만 22대 국회의 교제폭력 입법 소식을 듣곤 한달음에 서울로 왔다. 그도 참사 부모들과 같은 말을 했다. “저는 이미 애들을 잃었지만, 저 같은 피해자가 다시는 나오지 않아야 하잖아요. 이 나라에서.”

‘남의 아이’를 살리려 거리에 서는 마음은 감히 가늠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거대한 불행의 피해자가 아닌, 위대한 용기로 공동체를 이롭게 하는 부모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조금 전 학교에서 문자가 왔다. “학생들이 곧 학교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우리 아이가 무사히 돌아온 것은 아이가 오늘 만난 모든 어른들, 그리고 거리에서 ‘남의 아이’ 안전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준 모든 부모들 덕분이다. 그분들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남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