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이 무덤에서 일어날라

입력
2024.10.30 18:00
26면
삼성 품질 문제로 폰 출시 연기
삼성맨은 없고 '삼무원'만 넘쳐
이재용 제2창업 신상필벌 인사부터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귀를 의심했다. 삼성전자가 가장 얇고 가벼운 폴더블폰(화면이 접히는 휴대폰)이라며 야심 차게 준비해 온 ‘갤럭시 Z폴드 슬립 에디션’은 당초 25일 오전 9시부터 판매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품질 검수 과정에서 문제가 발견돼 당일 출시가 지연되다 사실상 연기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동통신 3사 온라인몰 판매는 기약도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부품 문제로 정상 출고까지 한 달 이상 지연될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삼성이 만든 제품에 하자가 많다는 것도 충격이나 이러한 사실이 출시 당일까지 걸러지지 않았다는 건 더 납득이 안 된다. 그만큼 사내 소통이 안 된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소비자 신뢰를 잃었다. 초일류 글로벌 기업 삼성전자에서 나흘 전 스스로 공지한 약속도 지키지 못한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삼성전자의 총체적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이날은 더구나 고 이건희 선대회장의 4주기였다.

삼성의 품질 문제는 처음이 아니란 점에서 심각하다. 지난 7월에도 무선 이어폰 ‘갤럭시 버즈3 프로’에서 균일하지 않은 불빛과 음질, 흠집과 도색 불량 등의 소비자 불만이 제기됐다. 이를 납품한 곳은 오너와 친척 관계인 업체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깊이 사과드린다”며 교환과 환불을 해줬다. 그런데 또 품질 문제가 터진 것이다. 이 선대회장은 1995년 3월 경북 구미사업장 운동장에 휴대폰 등 15만 대를 쌓아놓고 ‘애니콜 화형식’을 단행했다. 당시 불량률이 치솟자 충격 요법으로 “양이 아닌 질로 승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했다. 갤럭시 신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런데 이젠 가장 기본적인 품질마저 흔들리고 있다.

반도체 부문도 불안하다. 저조한 실적에 창사 이래 처음으로 사과문을 낼 정도다. 전영현 부회장은 “근원적인 기술 경쟁력과 회사의 앞날에까지 걱정을 끼쳐 송구하다”며 ‘세상에 없는 새로운 기술과 완벽한 품질 경쟁력’으로 재도약하겠다고 다짐했다. 기술도 품질도 문제란 걸 안다는 얘기다. 그러나 당장 개선은 어렵다. 엔비디아의 승인을 받아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납품하는 게 급하지만 이미 우수 인재들이 경쟁사로 떠난 터라 여의치 않다. 파운드리(위탁생산)도 좁혀야 할 TSMC와의 격차가 더 커졌다. 경쟁사에 뒤처지면 전사 차원에서 달려들어 밤을 새워서라도 따라잡던 옛 방식은 꿈도 못 꾸는 시대다.

일각에선 본사업을 지원해야 할 사업지원TF가 기술은 잘 모르고 재무적 수치만 중시하다 보니 연구개발과 신사업 투자에서 실기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엔지니어들은 소외감을 토로한다. 고액 연봉자가 많아지며 보신에만 신경 쓰는 분위기도 팽배하다. 자긍심 강하고 치열했던 삼성맨은 찾아볼 수 없고 기득권에 안주하는 삼무원(삼성 공무원)만 넘친다. 문제들이 얽혀 있어 대오각성하고 바꾸려고 해도 가시적 성과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눈치 빠른 외국인 매도로 주가는 ‘5만전자’다.

시선은 이제 이재용 회장에게로 향하고 있다. 30년 넘게 몸담은 한 전직 임원은 “선대회장이 무덤을 박차고 나와 불호령을 내릴 만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선대회장은 늘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며 위기를 경고하고,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고 변화를 다그쳤다. 인터넷 게시판은 “회사가 망할 것 같다”는 우려로 도배됐다. 그럼에도 이재용 회장의 침묵은 길어지고 있다. 물론 두 번이나 구속됐고 아직 2심 선고가 남은 상황에선 말 한마디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은 거대한 배가 침몰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수성이 아닌 제2창업의 각오로 '제2의 갤럭시 화형식'이라도 열어 기본부터 다시 챙겨야 한다. 신상필벌의 인사 원칙으로 인재제일 기술제일 품질제일의 삼성 철학만 구현해도 고비는 넘길 수 있다. 시간이 얼마 없다.


박일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