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오후 1시 30분 인천 중구 팔미도 앞바다. 팔미도와 인천대교 사이 해상에 떠있는 초록색 11번 부표에 배가 가까이 다가가자 김영순(70)씨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연신 눈물을 훔치면서도 "오랜만에 딸아이를 봐서 기분이 좋다"면서 국화 한 송이를 바다에 던졌다. 김씨는 25년 전 막내딸 이지혜(당시 18세)양의 유골을 이곳에 뿌렸다.
이양은 인천 중구 인현동 화재 참사 희생자 57명 가운데 한 명이다. 1999년 10월 30일 저녁 4층짜리 상가 건물 지하 노래방에서 난 불이 불법 영업 중이던 2층 호프집까지 번지면서 발생한 참사는 중·고등학생 52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이양도 그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호프집 아르바이트생이었다는 이유로 가해자로 분류돼 보상은커녕 소송에 시달렸다. 화재가 발생한 그날은 이양의 첫 출근 날이었다. 김씨는 "아이를 혼자 두는 것 같아서 인천을 떠나지 못하다가 (버티지 못하고) 고향인 경남 김해로 내려갔다"며 "그래도 (추모식을 위해) 매년 올라온다"고 했다.
다른 희생자 유족들도 온전히 위로받지 못했다. 이재원(73) 인현동화재참사유족회장은 이날 해상 추모제에서 "(사람들이) 우리 아들딸을 불량 학생이라고 매도하고 가족들도 싸잡아 '보상금으로 4억~6억 원을 요구한다'라고 비난한 것이 국가기록원 자료에서 확인됐지만 행정당국은 '모른다'고만 한다"고 울분을 감추지 않았다. 이 회장은 이어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는데, 어느 부모가 아들딸을 잃고 돈 얘기부터 하겠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청년단체 '인현동1999'에서 인현동 참사를 기억하자는 의미의 흰색 리본을 제작한 권나영(40)씨는 "당시 중학생이었는데, 학교에서 (희생자들이) 호프집에 가서 생긴 일이니 너네는 그러지 말라고 가르쳤던 기억이 난다"며 "저도 모르게 부채감이 생겼고, 화재 참사를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희망과 순결을 나타내는 흰색 리본을 만들어 나눠주는 활동에 동참하게 됐다"고 말했다.
삼풍백화점 붕괴(1995년), 대구지하철 화재(2003년), 세월호 침몰(2014년) 등 다른 대형 참사 유족 10여 명도 처음으로 해상추모제에 동참해 의미를 더했다. 이들은 참사 후 정부의 책임회피와 사회적 고립으로 고통받았던 경험을 공유하며 '연대와 위로'의 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유족인 윤석기(58) 재난참사피해자연대 부대표는 "공무원들이 인현동 참사를 호프집 화재로 통칭하면서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며 "인현동 참사는 감시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공무원들이 해야 할 일을 안 한 것에 각종 뒤 봐주기와 인허가 비리가 결합돼 발생한 인재로, 대부분의 다른 참사도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여동생(사망 당시 24세·백화점 직원)을 잃은 정군자(64)씨는 "붕괴 사고 당시 유족들이 데모하면 경찰서에 집어넣고 닭장 버스(경찰 버스)에 태워 먼 곳까지 데려가 버리고 오고 그랬다"며 "그런 일은 이제는 사라졌지만 (정부가) 참사 희생자와 유족들 간 갈등을 부추기고 분열을 시키고 하는 짓은 여전한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사회적 참사 때마다 법과 제도가 바뀌었지만 아직까지 갈 길이 멀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오선근(63) 생명안전시민넷 집행위원은 "(사회적 참사 발생 시 책임 소재를 밝힐 제도적 장치를 명시한) 생명안전기본법이 우선 제정돼야 한다"며 "법과 제도적 뒷받침에 더해 효율과 속도보다는 생명안전을 더 존중하는 방향으로 시민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부대표는 "대구지하철 화재, 가습기 살균제 사건 등은 국민 생명보다 기업 이익을 우선했기 때문에 발생했다"며 "참사 관련 법률에 공무원 처벌 조항을 넣는 등 책임 소재 규명을 의무화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