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이 2조5,0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실시한다고 30일 전격 공시했다. 이를 통해 고려아연은 열려 있는 지배 구조를 만들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재계에선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측이 사실상 영풍·MBK파트너스(MBK) 연합의 지분을 희석해 유리한 구도로 뒤집기 위한 전략을 내놓은 것으로 풀이했다. 이날 유상증자 공시 여파로 고려아연 주가는 물론 코스피까지 크게 영향을 받았다.
고려아연은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그랑서울 본사에서 임시 이사회를 열고 최근 자사주 공개매수 결과 및 임시 주주총회 소집 청구 사항 등을 보고하고 부의 안건으로 일반 공모 증자의 건을 의결했다고 밝혔다. 고려아연은 이사회 직후 보통주 373만2,650주에 대한 유상증자를 진행한다고 공시했다. 이번 유상증자 물량은 이날 기준 고려아연 발행 주식의 약 18%로 23일 마감한 공개매수를 통해 소각하기로 한 자사주를 빼면 전체 발행 주식의 20%에 해당하는 규모다. 1주당 모집 가액은 67만 원으로 청약일 전 3∼5거래일의 가중 산술 평균 주가를 기준으로 할인율 30%를 적용했다.
고려아연은 전체 모집 주식 중 80%에 대해서는 일반 공모를 실시하고 20%는 우리사주조합에 배정할 방침이다. 이는 자본시장법상 우리사주조합 배정 특례를 따른 것이라고 고려아연 측은 설명했다. 다만 고려아연은 조합을 뺀 모든 청약자에게 총 모집 주식의 최대 3%(11만1,979 주)까지만 배정할 계획이다. 고려아연은 "주주 기반을 확대해 국민 기업화를 추진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유상증자 카드는 청약 조건에 최 회장 측 묘안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아연은 일반공모 청약을 내세웠지만 3% 한도를 설정했다. 이렇게 하면 최 회장의 우호 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 우리사주조합엔 최대 4%의 지분을 배정할 수 있지만 MBK·영풍 연합은 유상증자에 참여해도 최대 0.6%의 지분만 추가로 받을 수 있다.
최 회장 측은 지분율 역전을 노려볼 수 있다. 현재는 35.4%(최 회장 측) 대 38.47%(영풍·MBK)로 최 회장 측이 약 3%포인트 밀리는 상황이다. 하지만 유상증자가 계획대로 되면 양측 지분은 동시에 희석되고 여기에 최 회장 측 우호 세력의 지분만 3, 4%를 더할 수 있게 돼 양측이 거의 동등해지거나 전세가 뒤바뀔 수 있다.
이날 영풍·MBK 연합은 고려아연의 유상증자 결정에 강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입장문을 내고 "기존 주주들과 시장 질서를 유린하는 행위"라며 "이번 결정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법적 수단을 강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들은 이어 "최윤범 회장은 고금리 차입금으로 주당 89만 원에 자기주식 공개매수를 진행해 회사에 막대한 재무적 피해를 입혀 놓고선 그 재무적 피해를 이제는 국민의 돈으로 메우려 하고 있다"며 "최 회장의 유증 결정은 자기주식 공개매수가 배임이라는 점을 자백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고려아연은 "이번 유증은 MBK와 영풍이 적대적 인수합병(M&A)으로 초래한 주가 급변동과 기업가치 훼손에 대한 우려 때문에 진행한 것"이라며 "상법과 자본시장법 등 관련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이뤄지는 일반공모 유상증자에 대해 또다시 왜곡과 시장교란 행위를 하면 엄중한 법의 심판을 물을 것"이라고 말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이날 고려아연의 유상증자 결정 소식이 알려지자 고려아연 주가는 하한가를 기록했다. 시총 10위권 종목의 폭락에 코스피까지 크게 흔들렸다.
이날 고려아연은 전날보다 29.94% 내린 108만1,000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개장 후 약세를 이어가던 주가는 유상증자 공시와 함께 하한가로 직행했다. 전날 31조9,452억 원이던 고려아연 시가총액은 이날 22조3,802억 원으로 쪼그라들었다. 하루 만에 10조 원가량이 증발한 것이다. 이날 코스피도 고려아연 공시와 함께 낙폭을 키워 최종 0.92% 하락 마감했다.
이에 한국거래소는 이날 고려아연을 투자 경고 종목으로 지정했다. 투자 경고 종목은 신용융자로 매수할 수 없고 매수 시 위탁 증거금을 100% 납부해야 한다. 이후에도 추가로 주가가 급등하는 경우 투자 위험 종목으로 지정될 수 있으며 투자 위험 종목 지정 당일 하루 동안 거래가 정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