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래 그림 한 폭, 산 위에 붉은 보석… 온달장군이 쏜다

입력
2024.10.3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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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보발재와 온달산성


도담삼봉, 옥순봉, 구담봉은 충북 단양팔경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남한강과 충주호가 빚은 절경이다. 여행도 대부분 이들 명소 중심이다. 충주호유람선, 만천하스카이워크, 단양잔도 등 즐길 거리가 주변에 몰려 있다. 단양 읍내를 기준으로 동북쪽에 위치한 가곡면과 영춘면도 풍광이라면 빠지지 않는데 상대적으로 발길이 적은 편이다. 자극적인 맛이 덜하고 호젓하게 가을 정취를 즐기기는 오히려 낫다.

보발재, 꼬부랑 고갯길의 한철 단풍놀이

가곡면과 영춘면을 잇는 보발재는 평시 차량 통행이 뜸한 고갯길이다.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가는 쉬운 길이 있으니 굳이 험한 길을 넘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고갯마루 아래 보발리 주민들만 주로 이용하는 이 길이 가을 한철에는 제법 붐빈다. 꼬불꼬불 여덟 굽이 도로 주변으로 단풍이 곱게 물들기 때문이다.

보발재가 대중에 알려진 건 오래되지 않는다. 이색 풍경을 찾는 사진작가들만 알음알음으로 알던 고갯길 풍경이 2017년 ‘대한민국 관광사진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으며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기회를 잡은 단양군은 도로 주변에 단풍나무를 더 심었고 올해는 고갯마루에 꼬부랑길을 굽어볼 수 있는 대형 전망대를 새로 설치하고 임시 주차장까지 마련했다. 보발리 부녀회는 주차장 한 귀퉁이에 먹거리 장터를 열고 다음 달 3일까지 잔치국수와 메밀배추전 등 간단한 요깃거리를 팔고 있다.


지난 24일 오전 9시에 도착했는데 이미 주차장에 차들이 제법 들어차 있었다. 고갯마루에 설치된 전망대에 오르니 아직 아침 안개가 자욱하다. 나름 운치가 있었지만 코앞의 도로 윤곽이 흐릿하다. 안개가 벗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먹거리 장터에서 잔치국수를 시켰다. 부녀회 회원들의 마을 자랑이 끊이지 않는다. 보발리는 보물이 솟아나는 곳이라고 했다.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가니 마을 중앙을 관통하는 도랑에서 여인들이 나물을 씻고 있었다. 집집마다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 옛날에나 볼 수 있었던 정겨운 풍경이다. 아랫마을에서도 이용하는 물이니 발을 담그거나 빨래를 할 수는 없다. 맑고 차가운 물에 적신 고들빼기 잎이 유난히 싱싱해 보인다.



수원지는 바로 위 용굴이다. 물길을 거슬러 조금 올라가니 산자락 아래에 녹색과 하늘색을 섞어 놓은 듯한 푸르스름한 물웅덩이가 있다. 굴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물이 작은 연못을 형성했다가 마을로 흐른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한겨울에도 얼지 않아 상대적으로 따뜻하다고 한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용의 굴에서 샘솟는 용천수가 이 마을의 보물이다.

정오가 다 된 시간, 다시 전망대에 오르니 안개는 말끔하게 걷혔는데 또 다른 복병이 생겼다. 골짜기를 덮은 산 그림자가 그 시간까지 도로 일부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눈으로 감상하는 데야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아무래도 사진이 예쁘게 나오기는 어려웠다. 오후 1시는 넘어야 할 것 같다. 도로가 산 그림자에 전부 가려진 이른 아침이나 흐린 날이면 더 산뜻한 모습을 볼 수 있겠다.

이곳만 유독 산이 험하고 골짜기가 깊은 건 아니다. 단양군은 소백산 아홉 봉우리와 여덟 골짜기가 겹겹이 빚은 절경을 구봉팔문(九峯八門)이라 부른다. 제1봉부터 차례로 아곡문봉, 밤실문봉, 여의생문봉, 뒤시랭이문봉, 덕평문봉, 곰절문봉, 배골문봉, 귀기문봉, 새발문봉이라 하는데 보발재 산 그림자는 덕평문봉의 영향이다.

‘늘봄마을’에 그윽한 가을 정취, 온달산성과 북벽

보발재 꼬부랑길을 내려가면 영춘면이다. 긴긴 겨울 나면 봄 햇살이 유난히 따사로워 ‘늘봄마을’이라 자랑하지만 가을 정취도 못지않게 그윽하다. 높은 산줄기를 감싸며 휘도는 남한강 물줄기 안쪽에 자리 잡은 면 소재지는 하루 종일 해가 드는 완만한 구릉이다. 들판도 제법 넓어 풍경이 사뭇 이국적이다.

이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 온달산성이다.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 온달이 신라가 쳐들어오자 이 성을 쌓고 맞서다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축성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는데, 조선 영조 때 편찬한 ‘여지도서’에는 온달이 을아조(乙阿朝)를 지키기 위해 축조했다는 전설이 소개돼 있다.




‘을아조’ ‘을아단’은 영춘의 옛 지명이다. 삼국사기는 ‘온달이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변의 휴석동 윷판바위, 장발리 선돌 등에도 온달과 관련된 전설이 서려 있다. 그러나 온달산성 발굴조사 결과 발견된 기와와 토기, 축성법은 신라 양식으로 드러났다. 처음에 고구려가 쌓았지만 6세기 중엽 신라가 다시 축성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와 각축을 벌이던 신라가 남한강 이북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때다.

산성은 해발 427m 정상부에 반달형으로 쌓았다. 북측으로 삐죽하게 돌출된 성벽의 곡선이 유려하고 아름답다. 성벽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지형을 고스란히 활용했다. 북측 성벽에서 남쪽 봉우리 정상까지 성안은 완만한 경사를 이룬 평지다. 소나무 몇 그루가 중심을 잡고 초지로 덮인 풍광이 전쟁을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푸근하고 평화롭다.

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바로 아래 온달관광지에서 시작된다. 약 1km, 왕복 50분 정도 걸린다. 짧다고 가볍게 다녀올 코스는 아니다. 탐방로 초입부터 북측 성벽에 다다를 때까지 꾸준히 계단이 이어진다. 체력 소모가 심해 마실 물 한 병 정도는 챙겨야 한다.





대신 산성에 도달하면 올라올 때의 어려움을 보상하고도 남을 정도로 멋진 전망이 펼쳐진다. 성 내부도 아늑하지만, 성벽 너머로 펼쳐지는 산세가 그림이다. 동강과 서강이 합쳐져 영월에서 흘러내리는 남한강이 보발재 꼬부랑길처럼 휘휘 감아 흐르고, 곡류 안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 온달의 시대로 거슬러 오른 듯 아련하다. 마을이 산성 북측에 위치하기 때문에 볕 좋은 한낮이나 저녁 무렵에 ‘늘봄’의 따사로움을 더 느낄 수 있다.

늘봄 마을 뒤편은 남한강에 수직으로 떨어지는 절벽이다. 조선 영조 때 영춘현감 이보상이 이곳에 ‘북벽(北壁)’이라 새긴 후 지금까지 그렇게 부르고 있다. 석벽이 병풍처럼 늘어서 장관을 이루는데 봄 철쭉, 가을 단풍이 멋스러움을 더한다. 북벽 아래 강물에는 1960년대까지 뗏목 사공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는데, 지금은 여름철 래프팅을 즐기는 코스다. 북벽을 바라보는 위치에 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따금씩 길손들이 호젓하게 소풍을 즐긴다.



산성 아래 온달관광지(입장료 5,500원)는 고구려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세트와 온달전시관, 온달동굴로 구성된다. 입구로 들어서면 성루에 태양 속에 산다는 세 발을 가진 까마귀이자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삼족오 문양과 이곳에서 촬영한 드라마 포스터가 내걸려 있다. ‘태왕사신기’ ‘연개소문’ ‘바람의 나라’ 등 방송 3사의 대작을 비롯해 여러 역사물을 촬영했다. 온달전시관은 설화로 전해지는 ‘바보’가 아니라 늠름한 고구려 장수 온달과 평강공주의 사랑이야기를 주로 담고 있다.



드라마 세트장 끝에 온달동굴이 있다. 주 통로와 가지를 합쳐 800m에 이르는 석회암 동굴인데, 450m만 공개돼 있다. 종유석과 석순, 동굴 안에 흐르는 개울 물소리가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곁길 일부 구간은 쪼그리고 이동해야 한다. 꼭 봐야 할 비경도 좁은 통로에 몰려 있다.

깊은 골짜기 한가득, 천태종 본산 구인사

온달 관광지에서 멀지 않은 골짜기에 구인사가 있다. 대한불교 천태종의 본산으로 전국 140여 사찰을 관장하는 큰 절이다. 1945년 상월 스님이 소백산 연화봉 아래에 칡덩굴을 얽어 3칸 초암을 지은 것이 시작이었다.

경내로 들어서면 대형 전각이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기본 5~6층에 이르는 현대식 한옥 건물이 경사진 골짜기를 가득 채우고 있다. 대법당을 비롯해 삼보당, 설선당, 인광당, 향적당, 도향당 등 50여 동의 건물마다 웅장한 기와지붕과 처마 행렬이 시선을 압도한다. 그 사이사이에 키 큰 단풍나무가 가지를 펼치고 있다. 조만간 붉게 물든 단풍과 단청이 어우러져 골짜기 전체에 곱게 가을이 내려앉을 듯하다. 지난 24일 주차장에서 경내에 이르는 도로변 은행나무는 이미 노랗게 물들었고 일부는 떨어져 바닥을 덮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사찰 입구까지 800m는 신도들을 실어 나르는 셔틀버스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내려올 때는 이용 불가). 경내에 들어서서 맨 꼭대기 대조사전까지는 또 그만큼 걸어야 한다. 길은 말끔하지만 경사가 심하다. 구도의 심정으로 느긋하게 걸어야 한다. 영춘면에서 단양 읍내로 되돌아올 때는 보발재를 넘는 대신 남한강과 나란히 이어지는 도로를 이용할 것을 추천한다. 가곡면 소재지까지 석회암 절벽과 어우러진 멋진 강 풍경을 즐길 수 있다.



단양=글·사진 최흥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