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인천 청라국제도시의 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일어난 메르세데스-벤츠(벤츠)의 전기차 EQE 화재 사고를 두고 독일 본사의 전기차 배터리 총괄 임원이 사고 차량에 들어있던 "중국 파라시스 배터리를 교체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사고 이후 차량 제조사인 벤츠 본사가 공식 입장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1일(현지시간) 벤츠 본사는 한국 기자단 30여 명을 독일로 초청해 배터리 개발 및 공급사 담당 벤츠 총괄 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약 1시간 30분 동안 인터뷰를 가졌다. 이날 질의응답에서 나온 20여 개 질문 대부분은 8월 인천에서 발생한 전기차 화재 사고에 대한 본사의 판단과 향후 대응 방안에 집중됐다.
벤츠 본사 임원들은 한국에서 발생한 전기차 화재 중 가장 큰 피해를 낳은 이번 사고에 대해 "유감을 표한다"면서도 경찰이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 전이라는 이유로 입장을 똑부러지게 내놓지 않았다. 특히 국내에서 판매되는 벤츠 전기차에 사고 차량에 있었던 파라시스 배터리를 계속 쓴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우베 켈러 배터리 개발 총괄은 "전기차 배터리 셀 공급업체로 중국 CATL과 파라시스가 참여하고 있어 (이 기조는) 당분간 유지될 것"이라며 "현재의 제품 라인업 같은 경우 일단 정해둔 게 있어 따라가야 될 것 같다"고 설명했다. 벤츠 EQS·EQE 등 상위급 모델 전기차 전용 생산 플랫폼인 'EVA2' 셀 공급업체에 두 회사의 이름이 올라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현재 차세대 상위 클래스 전기차를 만들 새 플랫폼을 개발 중인데 여기에 맞춰 공급업체를 바꿀 수도 있다"고 변경 가능성을 열어뒀다.
벤츠 본사에선 불이 난 EQE 350+ 전기차 차종에 들어가는 배터리 설계 자체엔 문제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앞서 벤츠 EQE 차주 등은 파라시스 배터리의 경우 에너지 밀도가 높아 열 폭주 위험이 큰데도 벤츠가 이를 예방할 적절한 설계나 장치를 갖추지 않았다며 본사를 상대로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켈러 총괄은 "다른 배터리 시스템과 똑같이 (불이 난 EQE) 시스템에도 열 폭주 등을 막기 위한 대책을 취했다"며 "배터리 설계 자체 이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벤츠 본사는 한국 수사기관의 조사 결과가 발표된 후 상황을 보겠다는 입장이다. 문제는 전기차 화재 특성상 불이 난 원인 파악에 꼭 필요한 배터리 관리 시스템(BMS) 등 차량 전체가 모두 불에 타 원인을 밝히는 게 쉽지 않다는 점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외부 충격으로 인해 배터리 셀이 손상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감정 결과를 내놨지만 뚜렷한 화재 경위에 대한 결과가 없어 전기차 화재를 둘러싼 공포감만 커지고 있다. 김성태 한국전기차사용자협회장은 "전기차 사용자들이 혐오의 대상이 됐는데 결정적 이유를 제공한 벤츠가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라며 "전기차 배터리 교체라도 제안하는 등 소비자들이 안심할 수 있는 메시지를 내야 그나마 신뢰가 생기기 시작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근본적으로 완성차 업체 차원에서 외부 충격에도 손상되지 않는 차량과 배터리 팩 제조에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호근 대덕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화재 원인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벤츠가 품질을 이유로 납품을 중단시키거나 계약 조건을 바꾸긴 어려울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비용이 비싸더라도 외부의 큰 충격에도 손상되지 않는 배터리를 만들기 위한 제조사의 원가 절감 및 마케팅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