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서울 성동구 SM엔터테인먼트 앞 광장에 근조화환 수백 개가 빽빽하게 늘어섰다. 물의를 일으켜 자숙에 들어갔던 아이돌 그룹 멤버 중 1명을 소속사가 복귀시키려 하자 이에 항의하는 팬들이 보낸 근조화환이었다. 자정 가까운 시간까지 '무임승차는 꺼져' 'OOO 아웃' 등 비방 문구를 두른 화환들이 쉴 새 없이 배송됐다.
이런 '근조화환 시위'는 최근 K팝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 하나의 의견 표출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소속사 상품을 구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소비 수준에 걸맞은 합당한 대우(소속사 결정에 대한 팬들의 의견 반영)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면 위협적인 실력 행사로 보이거나, 때로는 일반 시민들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다. '화환 폭탄'을 치우는 관계 기관 직원들의 고충도 만만찮다.
'근조화환 폭탄'은 정치권, 법조계에서 먼저 시작됐다. 지난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서울중앙지법 판사를 향해 보수단체에서 대법원 앞에 수백 개의 근조화환을 세워둔 게 대표 사례다. 지난 5월 악성 루머 대처를 촉구하는 BTS의 팬들이 소속사인 하이브의 용산구 사옥에 근조화환을 보내며 연예계로 퍼졌다. 하이브 사옥 앞에는 지난 9월에도 뉴진스 팬들이 보낸 근조화환이 무더기로 배달됐다.
근조화환 시위 확산에 경찰과 구청 등도 대응책을 마련했다. 현행법상 옥외집회 또는 시위 주최자는 시작 48시간 전 관할 경찰서에 사전 신고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이때 현수막 등 집회에서 사용할 용품을 적어야 한다. 여기에 화환도 포함시킨 것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이젠 근조화환을 집회 용품으로 본다. 신고 시 사용 개수를 사전에 명시를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개수 등이 신고 내용과 다를 경우 관할구청의 계고 처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SM엔터테인먼트 앞에서 열린 화환 시위는 이런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약 10개월간 활동을 중단했던 보이그룹 '라이즈'의 멤버 '승한'의 복귀 소식이 알려진 당일 엑스(X·옛 트위터)엔 "오후 6시 성동구 디타워 정문 앞에 근조화환을 보내달라"며 "같은 시간에 보내야 효과적이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신고를 안 해 치워지더라도) 일단 보내라"며 유도하는 글도 있었다. 이런 글들이 SNS로 퍼진 뒤 현장에 쌓인 화환만 한때 약 1,000개에 달했다고 한다. 갑자기 쏟아진 화환 폭탄에 경찰과 구청은 비상이 걸렸다.
문제는 절차를 안 지켜도 제재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경찰 관계자는 "화환은 가스통 등 위험 물품이 아니라 신고가 접수되지 않았다고 치우거나 하긴 힘들다"고 했다. 업체를 통해 배달된다는 특성 때문에 구매자를 특정하기 어려워 계도 작업도 까다롭다. 성동구청 관계자는 "화환을 배송하는 이들만 오가고 실제 주문자와는 접촉이 안 되는 상황이 이어졌다"고 토로했다. 불법 적치물이어도 사적 재산으로 볼 여지가 있어 함부로 치울 수도 없다. 화환 시위 이틀 뒤인 13일 승한의 탈퇴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 업체들이 일부 화환을 수거해 가기 전까지 성동구청에는 '통행에 방해된다' '도심 한가운데 장례화환이 빼곡해 섬뜩하다' 등 관련 민원만 30여 건이 접수됐다.
물론 모범 사례도 있다. 하이브로 근조화환을 보낸 팬들은 사전 신고 절차를 지켰고 화환 관리를 담당할 인력까지 고용해 현장에 상주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용산구청 관계자는 "해당 관리인이 경찰, 구청과 소통하면서 업체를 통해 신고된 시간 외엔 치우는 식으로 화환 시위가 비교적 질서 있게 진행됐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