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 균등과 인종차별 금지, 여성 지위 개선, 아동의 인격 존중, 노동시간 축소, 협동조합의 설치, 최저임금법·소작법·사회 보험법의 제정..."
1932년 9월 한 단체가 발표한 개혁 과제의 일부다. 이름하여 '사회신조(社會信條)'. 집회 현장에서 구호로 들어봤을 법한 문구는 놀랍게도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연합 단체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전 NCCK)'가 당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채택한 조문이다. 지금 봐도 급진적인 90여 년 전 조문은 당시 기독교 단체의 폭넓은 관심사와 개혁 성향을 짐작게 한다. 현재 한국 개신교에선 상상하기 힘든 진보적 종교의 모습이다.
1924년 출범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한국기독교연합회(1946년)를 거쳐 1970년부터 지금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로 이어지고 있다. 1980년대 이후 다양한 개신교 연합 기관이 생겼지만 지금까지도 NCCK는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연합 기관으로 인정받는다. 그 세월이 올해로 100년이다. 그 자체가 기독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NCCK가 발자취를 스스로 되짚은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시리즈(4권)를 최근 출간했다. 시리즈를 공동 집필한 안교성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은 "개항기 기독교부터 현재에 이르는 한국기독교 140년 역사를 정리한 최초의 통사"라며 "이 책을 통해 기독교의 사회적 참여와 시대의 응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리즈는 개항기부터 1공화국(1876-1960), 민주화와 산업화기(1960-1987), 민주화 이행기로부터 오늘(1987년 이후), NCCK 100년사(1924-2024)까지 4권에 걸쳐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담았다. 안 관장은 "구한말 선교사들로 인해 이식된 기독교는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사건마다 사회 운동을 통해 뚜렷한 흔적을 남기며 성장해 왔는데 지금까지 공식적 역사가 없었다"며 "NCCK 출범 100주년을 기념해 기독교 운동의 흐름을 정리해 한국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을 찾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방대한 역사를 정리하는 데 5년이 걸렸다. 교회사, 교회신학, 사회학, 지역학 등 분야를 고려해 선정한 15명의 집필진이 역사적 분기점마다 한국 교회가 어떤 생각을 하고 행동을 했는가를 기록했다. 의료와 교육으로 근대화 초석을 이룬 선교사들의 역할,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로 참여한 목회자들의 희생과 시민들과 함께 유신독재에 저항했던 기독교 단체들의 활동을 담았다. 동시에 1930년대 이후 신사 참배 강요 등 신앙을 위협하는 일제의 통치 속에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변절한 사실이나 이승만 정권기에 보였던 정치권력과의 유착 등을 다뤘다. 집필에 참여한 손승호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사무국장은 "교회사라고 하면 교회가 잘했던 이야기만 하고 끝나 버릴 수 있어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모여 기독교의 역사적 공과를 객관적으로 정리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한국교회 최초 연합기구인 NCCK의 역사를 다룬 4권 집필은 장로회신학대에서 역사신학 교수로 은퇴한 안 관장이 맡았다. 유신체제 이후 전국 각지의 기독교 단체가 구국기도회를 열어 전개한 구속자 석방 운동, 남북 평화 담론을 선제적으로 제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 등을 통해 기독교의 활약상을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찾아 정리했다. "한국 기독교의 정체성엔 '교회 사랑' 이전에 '나라 사랑'이 있었다"는 게 안 관장의 결론이다. 안 관장은 "엄혹한 근현대 시기를 거치며 한국 교회는 반정부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나라 사랑이라는 결단을 내리고 국내외 네트워크를 활용해 시대의 정의와 저항하는 시민들의 편에 섰다"며 "교인들이 모여 예수 믿고 구원받고 끝나는 공동체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종교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찾고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오늘날 교회가 되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