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문화, 내가 이 단어를 처음 읽었던 스무 살의 밤. 그 순간을 마치 전류가 흐르는 듯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젠더, 가부장제, 커밍아웃같이 처음 들어본 낱말들을 사전 찾아가며 읽던 밤. "남성들은 강간문화(rape culture)를 공유하고 있다"라는 문장에 덜컥, 걸려 넘어졌다.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직관적으로 이 낱말은 거슬렸다. 강간은 범죄 중에서도 흉악 범죄고 이는 극소수의 반사회적 남성이 저지르는 행위인데, 이를 두고 남성 일반의 '문화'라고 부르는 일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만 그런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2017년 11월 모 대학교 철학과 소모임에서 만든 '강간문화 철폐하기' 세미나 포스터 하나에 온라인이 뒤집어졌다. '강간문화'라는 낱말 하나를 걸고넘어졌다. "명예훼손"이라는 반응부터 "그럼 남학생들은 죄다 강간범이라는 얘기냐", "우리 학교가 강간대학교라는 거냐"라는 댓글이 이어졌다. 학교 측은 세미나 주제인 '강간문화'라는 말을 문제 삼아 학생들의 세미나 진행을 위한 공간 대관을 불허하기도 했다. 이 낱말은 여러모로 곳곳에서 덜컹덜컹했다.
강간문화, 이 낱말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 스무 살의 밤이었다. 대중교통이 끊어진 시간 여성 동료들이 혼자 택시를 타기 무섭다며 함께 타고 갈 사람들을 모았다. 방향이 달라 혼자 택시를 타야 했던 한 여자 선배가 날 보면서 "나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택시 번호 잘 적어둬"라고 했다. 어둠 속을 향해 나아가는 택시의 번호를 처음 적어보던 날. 그저 집에 가는 것일 뿐인데, 어쩌면 일어날지 모르는 사건으로 '강간'을 떠올린다는 사실을 처음 느끼게 된 날. 방금까지도 함께 웃고 떠들던 여성 동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밤길에 벌어질 가능성 높은 사건으로 강간을 염두에 둔다는 것을 알게 된 그날. 섬뜩했다.
그 감각은 남성인 내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고 조심해야 한다고 훈련받은 적 없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참, 이상했다. 2022년 성폭력 안전실태조사 연구에 따르면 "밤늦게 혼자 다닐 때 성폭력을 겪게 될까 봐 두렵다"라는 항목에 그렇다고 응답한 비율은 여성 63.4%, 남성 10.3%로 6배 차이가 난다. 2030세대로 좁혀보면 성별 간 응답률 격차는 7~9배까지 더 벌어진다. 폭력의 예감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보편적 신경증은 강간 범죄 피해자의 97.6%(경찰범죄통계, 2020)가 여성이라는 것을 보면 보다 선명해진다.
그날 밤, 택시 번호를 얼마나 많이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그날 밤 그 택시 번호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여성들이 폭력에 대한 예감을 일상적으로,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느끼고 있다는 것을 점차 알아나가면서, 의아했다. 왜 이토록 다른 것인지?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수 있는 것인지? 폭력의 예감은 왜 유독 여성의 신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인지? 남성은 왜 일상 속 강간 범죄의 대상이 되리라 상상되지 않는지? 남성은 왜 이토록 감각적 특권을 누리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강간의 역사와 정치를 다루고 있는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의 저자 수전 브라운밀러는 강간을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공포에 사로잡힌 상태에 묶어두려고 의식적으로 협박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하며 "강간은 정욕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폭력의 범죄"라고 규정한다. 강간을 젠더 권력의 문제라고 말하는 그는 "강간은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이며 통제할 수 없는 욕정에 의한 범죄가 결코 아니다. 정복자가 되고 싶은 남성이 여성에게 두려움을 주고 협박하려는 의도로 계획한 비하 및 점령행위, 즉 의도적으로 여성을 적대하는 폭력행위다. 이것이 바로 강간의 실체다"라고 말한다.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고, 두려움을 내면화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젠더 정치의 전략으로 강간이 있다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태도를 용인하고, 장려하며, 선전·선동하는 문화적 요소가 바로 강간문화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너무 예민하다, 과장됐다, 피해망상이다,라고들 말한다. 강간문화는 남성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강간문화 속 강간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강간은 거친 섹스이고, 강간범은 짜릿한 섹스를 즐기는 진짜 남자로 불린다. 강간이 아니라 놀이로, 음탕한 장난으로, 짓궂은 호기심으로 여겨진다. 강간문화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성적인 공격성과 폭력성을 보통(normal) 남성의 규범(norm)으로 정상화(normalize)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린 시절부터 생애 주기별로, 다양한 방식으로 강간문화는 학습된다. 특히 학교가 그렇다. 남성 무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공격적 남성성'과 '폭력적 남성성'은 필수이기 때문이다. 공격성은 "남자애들이 다 그렇지"로 용인됐고 폭력성은 "혈기 왕성한 애들이 그럴 수 있지"로 승인됐다. 그 속에서 우리 남성들은 꽤 오랫동안 모든 여성이 강간당하기를 은밀히 원한다,고 배워왔다. 막상 남자의 맛을 보면 여성은 즐거워한다,고 들어왔다. 이러한 강간 신화는 포르노가 재현했고, 남성들은 강간문화의 자음과 모음을 익히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들을 향한 외모 품평, 야한 농담과 여성혐오적 발언, 유머인 것처럼 이뤄지는 성희롱, 성 경험을 부풀려서 전시하는 행위 등을 통해 강간문화의 기본 문법을 차례로 익혀 나갔다. 재미와 놀이 삼아 성폭력 가해를 저지르고, 여기에 동조하고 방관함으로써 남성들 간의 결속을 다지게 되고 점차 이를 아무렇지 않게 실천하게 만든다. 이게 강간문화의 면모다.
이에 동참하지 않으면 또래 남성 그룹 내에서 곧바로 '계집애 같은 놈' '게이 같은 놈'으로 손쉽게 위계화되고 낙인찍힌다. 여성혐오와 동성애 혐오의 가학적 면모는 남성 집단에 매복해 있을지 모를 불순분자에 대한 응징으로 더욱 강렬해진다. 계집애처럼 보여서도 안 되고, 게이처럼 보여서도 안 된다. 그 순간 끝이다. 강간문화 속 남성성은 다른 존재자들을 짓누르는 방식으로 약탈적 남성성을 구성하게 한다.
딥페이크 성 착취물 텔레그램 방은 입장에 앞서 "댓글로 1명 이상 능욕하라. 안 하면 바로 강퇴다"라는 기본 규칙이 있었다. 강간문화 속에서 자신이 확실한 남성임을 증명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능욕이었다. '능욕(凌辱): 여자를 강간하여 욕보임'의 뜻풀이에서도 드러나듯 그들이 요구하는 능욕은 언어 강간이다. 이것이 딥페이크 텔레그램 방의 기본이었고 이것은 "아군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안내됐다. 능욕하는 것으로 아군이 된다. 강간문화 속 남성성은 이렇게 잠재적 강간 예비군으로 끊임없이 훈련받는다.
지난달 12일 '여성혐오 폭력 규탄 공동행동'이 발표한 성명서는 "딥페이크를 비롯한 각종 성 착취 범죄는 남성 중심 강간문화에 뿌리를 둔다"고 명시했다. "범죄를 부추기고 여성들을 능욕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가해자의 대다수는 강간문화를 향유하는 남성들"이라고 지목했다. "여성을 성적으로 소비하고 착취하는 강간문화는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더 많은 여성의 삶을 파괴"하고 있기에 "한국 사회에 녹아든 강간문화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했다. 남성들에게는 너무 자연스러워서 보이지 않는 강간문화가, 그에 의해 실제 피해를 보고 있는 여성들에게는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아마 남성들은 잘 들리지 않을 것이다. 마치 공기와 같이 당연시된 특권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강간문화 속에서 어릴 때부터 훈련받는 남성들에게 강간문화를 '이해'시키고자 하는 건 막막한 일이다. 기존에 익숙한 쾌감과 미감, 가치관과 신념을 재발명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재발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생각이 아니라 감각을 바꿔내야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보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