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 다닐 때 서울 삼성역으로 심부름을 자주 갔다. 으리으리한 인터컨티넨탈 호텔 앞을 지날 때마다 레스토랑 광고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곤 했다. 시즌별로 바뀌는 이국적인 요리가 참 맛있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점심값을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벌벌 떨던 때라 가격이 얼마인지 알아볼 엄두도 못 내고 그저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여기서 꼭 점심 먹어야지”라고 굳게 다짐했다. 만화책을 보다가 이 오래된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미지의 세계'로 유명한 이자혜 작가의 출판만화 ‘밀알의 양식을 주시옵고’는 지방에서 올라와 혼자 자취하는 청년 여성 ‘한밀알’의 미식 도전기다. 밀알은 돈도 친구도 애인도 없지만 최근 팬이 되어 ‘입덕’한 만화 ‘도봉 히스토리아’ 보는 맛으로 산다. 면접을 망치고 나와 우울할 때에도 이 만화만이 유일하게 밀알을 위로해준다.
이날 새로 올라온 만화를 보고 도파민이 과하게 솟구쳐 오른 밀알은 충동적으로 호텔 레스토랑에서 10만 원짜리 코스 요리를 맛본다. 황홀한 맛이다. "세상은 멋져. 돈만 있으면 말이지…" 생활비를 탕진했으니 상하차 알바라도 뛰어야 하나. 다시 '취준 거지'의 현실로 돌아가려는 순간, 방금 본 면접에서 합격했다는 소식이 날아온다. 밀알은 낡아서 가루가 떨어지기 시작한 가방에 살뜰하게 넣어둔 네 캔 만원 맥주로 취업을 자축한다.
이제 무채색이었던 밀알의 일상을 환하게 밝혀주는 빛은 둘이 되었다. 덕질(팬 활동), 그리고 맛있는 음식. 가장 싼 채소를 대충 볶아 먹곤 했던 밀알은 회사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양꼬치, 타르타르, 똠얌꿍 같은 음식을 먹어본다. 근사한 데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인생을 잘 살고 있는 것만 같고 이제 어엿한 어른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가난한 사회초년생은 돈을 쓰면 그만큼 긴축이라, 가방을 바꾸면 찐 감자로 점심을 해결해야 한다. 이 작품은 식도락 만화를 표방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화려하게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찐 감자와 스시 오마카세 사이’를 갈지자로 오가며 어른의 세계에 진입하고자 애쓰는 청년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반드시 점심을 먹으러 가겠다고 별렀던 그 호텔에 아직 가보지 못했다. 나이를 이만큼이나 먹었는데도 호텔 런치는 내게 여전히 '어른'의 음식인가 보다. 밀알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호텔에 또 호기롭게 갈 수 있을까. 미리 공부하지 않고도 스시를 먹으러 갈 수 있을까. 내가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아닌지 눈치 보지 않고 식사를 즐길 수 있게 될까. 궁금한 이야기가 너무 많다. 웃기고 찡하고 맛깔나고 흥미진진한 이 만화의 후속편을 반드시 보고 싶다. 작가님, 밀알은 아직 먹을 게 많습니다. 부디 밀알에게 더 많은 양식을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