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부실 수사로 증거 사라져"… 미궁에 빠진 발달장애인 성추행 사건

입력
2024.10.24 04:30
동료 발달장애인에게 성추행 당해
7세 수준 지적장애 여성 진술 번복
보호자 동석·영상녹화 의무 등 어겨
증거 부족으로 불송치·불기소 결정
경찰 "참고인 진술 등 종합 판단"

지난해 7월 전남 순천시에서 발생한 한 발달장애인 성추행 사건을 두고 경찰 수사가 부실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지적 장애를 가진 피해자가 진술을 번복한 것이 경찰과 검찰의 불송치·불기소 처분의 결정적 이유가 됐는데, 수사관이 진술을 확보하는 과정에 수사 원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다.

23일 전남경찰청 등에 따르면 지난해 7월 27일 20대 발달장애인 여성 A씨가 직장 내 성추행을 당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1급 지적장애를 가진 A씨는 발달장애인들을 전문적으로 고용하는 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당시 A씨의 가족은 퇴근시간이 되자 마중을 나갔고, 이 과정에서 A씨 가 직장 동료인 40대 발달장애 남성 B씨와 함께 인근 건물에서 나오는 모습을 목격했다. 수상한 낌새를 느낀 가족들은 이를 추궁한 끝에 A씨가 B씨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경찰에 고발했다.

신고 이후 성폭력 피해자 지원센터인 전남 동부 해바라기센터는 A씨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또 B씨가 A씨에게 40여 차례에 걸쳐 "사랑해" 등의 내용이 포함된 문자메시지를 남겼고, 이에 부담을 느낀 A씨가 B씨 번호를 차단한 사실도 확인됐다.

하지만 이같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전남경찰청은 같은해 10월 해당 사안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이같은 결정은 9월 11일 A씨 자택에서 진행된 4분여 간의 면담 결과 때문이었다. 경찰은 당시 A씨로부터 B씨와 합의가 있었다는 진술을 확보, 이를 근거로 피해자의 진술을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A씨가 만 7세 수준의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경찰이 진술 과정에서 신뢰 관계인들의 동석하지 않은 것은 물론 영상 녹화와 진술 조서도 확보하지 않는 등 수사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30조는 19세 미만 피해자 등의 진술 내용과 조사 과정을 영상녹화장치로 녹화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36조는 수사관이 피해자 조사 전 진술 조력인에 의한 의사소통 보조를 신청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피해자 측에 고지하도록 하고 있다. 전남경찰청 수사심의위원회는 당시 수사관들이 조사 의무 사항인 영상 녹화 대신 녹음으로 갈음한 사실을 확인, 교육 조처를 내렸다.

A씨측은 경찰의 불송치 결정에 불복해 이의신청을 제기했지만, 검찰 역시 A씨의 번복된 진술과 B씨의 진술 등을 근거로 최종적으로 이달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해당 사건을 지원한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 관계자는 "담당 수사관들이 A씨가 B씨를 차단한 문자 기록, 해바라기센터 분석보고서 등의 증거를 채택하지 않았다. 피해자의 가족에 대해서도 참고인 조사조차 진행하지 않았다"며 "경찰의 불송치 결정 이후 이의신청, 항고, 재정 신청 등 관련 절차를 거쳤지만, 부실 수사로 인해 핵심 증거인 피해자 진술의 증거 능력이 상실돼 모두 기각됐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전남경찰청 관계자는 "검찰이 90여 일간 해당 사건 기록을 들여다보고 재수사 대신 불기소로 판단을 내렸다"며 "진술 면담 당시에 바로 옆 방에 가족들이 있었고, 문도 열려 있어 가족들 역시 충분히 조사 과정을 들을 수 있는 상황으로, 수사심의위원회에서도 신뢰 관계인이 동석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해명했다. 이어 "불송치 결정은 피해자 진술뿐 아니라 목격자와 참고인 진술, 폐쇄회로(CC)TV 영상 등 다양한 증거들을 토대로 종합적으로 판단을 내린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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