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6월 24일, 당시 34세였던 빌 라슨은 이날도 어김없이 '업스테어스라운지'에 들렀다. 미국 루이지애나주(州) 뉴올리언스에 있었던 이 술집은 동성애자 남성들만 이용하는 이른바 '게이바'였다. 당시 미국 동성애자들에게 이 공간은 사실상 유일한 안전지대였다. 성적 지향을 들키면 일터와 가정에서 쫓겨나고 형사 처벌을 받던 시대였다. 이곳에서 게이들은 자유롭게 어울렸고, 일요일에는 개신교 예배까지 열었다.
라슨에게도 업스테어스라운지는 의미가 컸다. 아동보호소에서 자란 라슨은 성장기 내내 또래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고 이 사건을 추적한 작가 로버트 휘슬러는 전했다. 이성애자 남성과 말투나 걸음걸이가 다르다는 이유였다. 성인이 되어서도 이 꼬리표는 사라지지 않았다. 라슨은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기간이 끝난 1946년부터는 이렇다 할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1947년에는 이성애자 위장 사실을 들켜 혼인 2년 만에 이혼했다. 그 뒤 라슨은 이름과 직업을 바꾸며 미국 전역을 떠돌았다.
그러한 라슨을 업스테어스라운지는 개신교 목사로 고용했다. 1968년 설립된 친(親)성소수자 교단 '메트로폴리탄커뮤니티처치스'(MCC)가 신앙심 깊던 라슨을 눈여겨본 결과였다. 라슨은 이것이 얼마나 귀한 기회인지 매우 잘 알았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2019년 뒤늦게 쓴 그의 부고 기사에서 "라슨은 끔찍하게 열심히 일했고 교단 재정이 어려우면 사재를 기부했다"고 전했다. 이날도 라슨은 동성애자 남성 약 110명과 대화하며 어렵게 찾은 평안을 즐겼다.
그러나 이날 오후 8시 이 모든 기쁨과 슬픔, 연대와 평안은 한순간에 잿더미가 됐다. 아직까지도 붙잡히지 않은 누군가가 술집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오래된 목조 건물은 삽시간에 큰 불길에 휩싸였다. 화재는 16분 만에 진화됐지만 성소수자 31명이 목숨을 잃었다. 라슨은 창문으로 탈출하려다가 창살에 끼인 채 사망했다.
이 방화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동성애자 대상 범죄 중 하나로 거론된다. 2016년 최소 49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플로리다 '올랜도 총기 참사'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성소수자 희생자를 낸 사건이다. 지역사회에도 전례 없는 재난이었다.
31명이 사망한 방화 사건에 전폭적인 진상 규명 및 재발 방지 요구가 쏟아져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생존자들과 희생자 유가족들은 지역 당국이 성소수자 혐오 탓에 사실상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한탄했다. 결국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미제로 남게 됐다.
사실 방화 용의자는 비교적 확실했다. 당시 26세였던 로저 누네즈가 유력한 범인이었다. 게이였던 누네즈는 사건 몇 시간 전 업스테어스라운지에서 종업원과 다투며 소란을 피웠다. 술집에서 쫓겨나며 "모두 불태워 버리겠다"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누네즈 인상착의를 꼭 닮은 사람이 인근 상점에서 라이터 연료 약 200그램을 구매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술집에서 발견돼 경찰이 방화 수사를 시작하게 만들었던 것과 같은 제품이었다. 모든 정황이 누네즈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찰은 범인 찾기에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경찰은 누네즈를 용의선상에 올리고도 '거처를 파악할 수 없다'며 몇 개월 동안 수사를 뭉갰다.
심지어 누네즈는 사건 발생 약 6개월 뒤인 1973년 12월 지역 수녀 등에게 "약간의 불과 연기를 일으킬 생각이었다"며 자백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신고를 받은 경찰에게 누네즈는 '술에 취해 거짓말을 했다'고 말을 바꿨다. 경찰은 이 해명만 듣고 추가 증거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누네즈는 결국 1974년 11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경찰은 수사를 종결했다.
지역 경찰은 최근까지도 이 사건 수사에 최선을 다했다는 입장이다. 당시 수사 책임자였던 팀 게비아는 2013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 "방화 사건 관련 (일반인이)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쉽지만 법률적으로 혐의를 입증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며 "수사팀은 최선을 다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경찰 해명을 믿는 생존자와 희생자 유가족은 거의 없었다. 당시 지역사회 전체가 이 사건에 침묵과 적개심으로 일관했고, 경찰도 동조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을 두고 애도 성명을 낸 지역 기관은 없었다. 주지사와 시의회, 지역 교회가 나서서 입장문을 발표했던 1년 전 뉴올리언스 고층빌딩 화재 당시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당시 뉴올리언스 대주교였던 필립 해넌은 희생자 장례를 치러달라는 MCC 요구를 거부했다. 지역 화재 사례를 정리해 전시했던 뉴올리언스 소방 당국도 박물관에 업스테어스라운지 방화 사건 기록을 올리지 않았다. NYT는 "완고하고 설명하기 힘든 침묵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적극적인 모욕도 쏟아졌다. 타임은 "당시 지역 라디오는 '방화 피해자들을 조롱하는 인터뷰를 공공연하게 내보냈다"고 전했다. 사건 묘사에 성소수자 멸칭을 쓰거나, 방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거나, 생존자 실명을 공개한 매체도 있었다. 수사 책임 경찰관마저 지역 신문에 "그 술집은 도둑들이 어울려 지내는 곳이었다. 알다시피 그곳은 게이바였다"고 말했다.
적대적인 사회 분위기는 증인들이 나설 자리를 빼앗았다. 생존자와 희생자 지인들은 수사 협조는커녕 사건과 관련이 없는 척 연기해야만 했다고 한다. 희생자 지인인 마이클 모로는 2015년 이 사안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사건에 관심을 가지면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발각돼 직장에서 해고될 수 있는 분위기였다"며 "화재가 있었는지조차 모른 척해야 했지만 속은 애통함으로 꽉 막혀 목이 막힐 정도였다"고 말했다. '동성애 혐오 정서가 수사를 막았다'는 비판이 나왔던 이유였다.
이미 목숨을 잃은 라슨 역시 모욕을 피하지 못했다. 사건 당일 라슨의 시신은 창문틀에 낀 채 방치되어 있었다. 화재가 일찌감치 진압됐음에도 구조 당국은 시신에 면포 한 장도 덮어주지 않았다. NYT는 사건 다음 날 발행한 단신 기사에서 "라슨은 (화재를 보러 온) 관중들 앞에서 4시간 동안 마네킹처럼 누워 있었고 입은 비명을 지르는 듯 벌려져 있었다"고 묘사했다.
라슨을 애정했던 지인들에게 이는 엄청난 모독으로 받아들여졌다. 성소수자 신도들에게 라슨은 따듯한 사람이었다. 라슨은 사회와 종교, 가정 어느 곳에도 소속될 수 없었던 이들과 어울러 노래 부르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세상 그 어디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곳보다 나은 장소는 없습니다." 1970년 밴드 '브라더후드오브맨'이 만든 '유나이티드위스탠드'라는 곡은 현재 미국 성소수자 운동을 상징하는 주요 노래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방화 이후 라슨도, 업스테어스라운지의 다른 고객들도 더 이상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됐다.
라슨의 장례도 순탄치 않았다. 당시 오하이오에 거주했던 그의 모친이 '성소수자 아들이 부끄럽다'며 유해를 인수하라는 지역 당국 요청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MCC가 그의 유해를 지하 납골당에 명패도 없이 안치했다. 8년 뒤인 1981년에야 지역 신도 2명의 기부로 명패가 생겼다. 뒤늦게 라슨의 존재와 죽음을 알게 된 종손 마이클 립스콤은 NYT에 "그가 이런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이 너무 끔찍하다"고 한탄했다. 사건 직후 방치돼 아직까지 시신을 찾지 못한 희생자도 3명에 달한다.
최근에는 업스테어스라운지 방화 피해자의 명예 회복 작업이 진행되고 있기는 하다. 1980년대부터 이 참사를 다룬 학계 연구가 시작됐다. 2013년 참사 40주년에는 당시 뉴올리언스 시장이었던 미치 랜드리우와 대주교였던 그레고리 에이몬드가 지난 무관심을 공식 사과했다. 2022년 8월에는 뉴올리언스 시의회도 사과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혐오가 남긴 상흔은 여전히 선명하다. 범인을 잡아 책임을 물릴 가능성도, 희생자 3명의 시신을 찾을 확률도 희박하다. 휘슬러는 "이 사건은 너무 오랫동안 은폐되어서 아직도 밝혀내지 못한 세부 사항들이 많다"며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를 기억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