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재벌 그룹 중 후대 승계가 진행되고 있는 5개 그룹의 지주사 주가가 극심한 저평가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주사와 핵심 자회사 주가 성장률 차이가 최대 60배 이상 나면서 지주사 주가가 과도하게 눌려 있는 모습이다. 주가가 오를수록 상속세 부담이 커진다는 점을 들어 그룹 총수의 내심이 반영된 결과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27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기업 승계 중인 현대모비스, 한화, HD현대, GS, CJ의 평균 주가순자산비율(PBR)은 0.5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코스피 전체 평균 PBR인 0.90에 크게 못 미친다. 한화의 경우 올 초 대비 PBR이 0.46에서 0.25로 역주행했다. PBR은 주가를 장부가치로 나눈 비율로, 1보다 낮다는 것은 주가가 저평가돼 있다는 것을 뜻한다. PBR 1 미만 기업이 스스로 주가 부양책을 내놓도록 유도하겠다는 정부의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프로그램과도 동떨어진 결과다.
지주사의 기업가치가 저평가된 배경에 기업 승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대 60%에 달하는 상속세를 감안하면 그룹 총수의 입장에선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지주사의 주가가 오르지 않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실제 핵심 계열사의 주가는 꾸준히 성장하는 것과 달리 지주사 주가는 장기 횡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 5년간 현대차 주가가 85% 오르는 사이 현대 모비스(지주사) 주가는 5.5% 오르는 데 그쳤다. 역시 5년간 한화(지주사) 주가는 14.4% 올랐는데,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주가는 무려 843.3%나 상승했다. HD현대(지주사) 주가도 5년 사이 16.2% 오른 반면 HD한국조선해양 주가는 56% 올랐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구글 실적이 좋으면 지주사인 알파벳이 오르는 것처럼 그룹 내 핵심 계열사와 지주사의 주가는 엇비슷하게 움직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승계와 관련된 국내 기업에선 주가를 올리려는 유인이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이전 사례도 이를 방증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승계 과정에서 삼성물산 주가를 의도적으로 눌렀다는 의혹으로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상속세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삼성 그룹의 핵심 지주사인 삼성물산과 이 회장이 대주주로 있던 제일모직 간 합병 전략을 택했다는 혐의다. 2014년 하반기 평균 7만1,800원 수준이던 삼성물산 주가는 합병이 발표된 2015년 5월 5만5,700원까지 22%가량 빠졌다.
현대차 그룹을 이끄는 정의선 회장 역시 그룹의 핵심인 모비스 주가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정 회장이 보유한 모비스 지분은 0.32%에 불과하다. 정몽구 명예회장이 보유한 모비스 지분(7.24%) 등을 상속할 경우 정 회장이 내야 할 상속세만 현재 가치로 3조 원이 넘는다.
HD현대, 한화, CJ, GS 등 그룹 3·4세는 승계를 위해 지주사 주가가 빠질 때마다 지분을 사들이고 있다. 이들이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확보할 때까지는 지주사 주가가 장기 횡보할 것이라는 시장의 추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기업들은 승계 절차와 지주사 주가가 어떠한 상관관계도 없다고 주장하지만 시장에선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하고 있다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기업 제국을 통치하는 재벌 가문의 이해관계는 소액주주의 이해관계와 일치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라며 "특히 한국의 높은 상속세율 탓에 재벌가가 주가 부양을 원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올 초 민생토론회에서 "과도한 상속세가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의 원인"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최근 '고려아연 사태'가 발생하면서 승계를 앞둔 재벌 그룹의 상황은 복잡해졌다. 주가가 지나치게 저평가돼 있는 상황 때문에 헤지펀드 등이 지주사 지분을 매집한 뒤 경영권 분쟁을 일으키기가 쉬워졌기 때문이다. 실제 고려아연 주가는 수년간 40만 원대를 횡보했는데, 경영권 분쟁 이후 24일 기준 113만 원까지 올라섰다. 주요 그룹 지주사가 '제2의 고려아연'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일부러 주가를 눌러 경영권 승계를 효율적으로 하려는 우리 재벌 그룹의 빈틈을 노린 헤지펀드의 공격이 충분히 가능하다"며 "경영권 침탈 시도를 막기 위해 적정 주가로 끌어올리면 상속세 부담이 커져 승계가 문제가 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